“북한어린이 도와 통일 주춧돌 놓는 게 마지막 소원”
80평생 가난한 환자 돌본?양산 이복순 할머니
장기려 박사 타계 26주기 맞아 AsiaN에?편지
오는 12월25일, ‘한국의 슈바이처’ 고 장기려(1911~1995)박사 별세 26주기를 맞아 1960~70년대 부산성분도병원(현 부산성모병원), 부산적십자병원에서 간호과장을 지내는 등 ‘백의의 천사’로 평생을 보낸 경남 양산시 평산동 이복순(82) 할머니가 AsiaN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이복순 할머니는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북한어린이를 도와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했습니다. <편집자>
부산의 의사출신인 정의화 의원이 전일에 내게 전화로 전한 말인즉 봉생병원 창설자이신 김원묵 선생의 고향이 평양근교이고 그 곳에 제3봉생병원을 갖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10년간 장기려 선생님이 운영하신 건강관리소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준 분이고 어려운 가정의 청소년들을 자기 병원 직원으로 받아준 박애정신이 있는 분이라 봅니다.
북한에는 폐결핵으로, 영양부족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많답니다. 하루속히 병원을 지어 환자를 도와주고 큰 제약회사들은 약을 보내고 우리 어머니들은 밥 지을 때마다 쌀 한줌씩 모아 보내주면 치료도 되고 굶주림도 덜겠지요.
구름 낀 날보다 햇볕이 쨍쨍 나면 얼마나 살기 좋습니까.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계속 되었으면 합니다. 좋은 일로 왕래를 하고, 같은 겨레이니 개성공단도 활성화되고 북에는 지하자원도 많으니 서로 도와 북한에 경제가 나아진다면 통일도 빨리 오겠지요.
약 한 첩, 쌀 한 톨 모아 북한 도울 때
제 나이 팔십이 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83세에 돌아가셨답니다. 나도 가끔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 이웃노인병원을 방문하여 급할 때 입원하여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볼까 합니다.
저는 부산 서구의 천마어린이집을 15년 운영하였습니다. 원장이 병으로 누워있고 제일 큰 어린이집이 운영이 어려우니 구청장이 장기려 선생님께 부탁하여 내가 청십자사회복지 일을 운영하며 두 곳 일을 보다 보니 70까지 일을 하였습니다.
결손가정이 많은 지역이라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바로 이웃에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집에 와도 엄마가 없어 밥을 먹을 수가 없으니 어린이집을 찾아옵니다. 식당 방에서 밥을 먹이고 서무선생이 엄마 대신 숙제를 도와주었고 150명이니 원복을 맞출 때 원장에게 선물을 한다고 합니다.?하여 사례비로 원복 몇 벌 달라고 하여 어려운 가정 어린이는 그냥 입혔지요.
간혹 보호자가 돈봉투를 가지고 오면 가서 과일을 사다달라고 하여 간식으로 먹였답니다. 교사들이 그런 환경에서 지내서 그런지 내가 어린이집을 그만둔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한해도 안 거르고 매년 스승의날이면 강원도로 이사 간 교사까지 이 늙은이를 찾아와 준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은 청십자 시절 부산에 간호학과 4학년 졸업반을 5년간 지역보건 실습을 지도하였는데 근 27~28년이 지났건만 일주일에 한번씩 안부전화를 준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스님 같이 맑고 향기 나는 삶을 살고 싶답니다. 나의 삶 중에 장기려 선생님 같은 고매한 분을 모셨고 알게 되었다는 자부를 가지고 살다가겠습니다.
장기려 선생의 향기 나는 삶 따라 반백년
그간 내가 살아온 중에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더 적습니다. 철자법도 틀리고 읽기 어려워도 늙은이의 마음으로 쓰니 참고 읽어주세요.
우리 집은 서울이었고 내가 어렸을 때 오라버니가 헌병(일본)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충남 마곡사 위에 산골로 이사를 갔답니다. 그곳까지 찾아와 집을 비우고 더 산골로 이사를 하였고 아버님은 고향인 가평으로 가셨으며 배급 쌀도 못 타먹으니 어머니는 행상을 나가시고 오라버니는 깊은 암자를 전전하고 살았으며 어린 나는 혼자 있다 헌병들에게 혼이 났지요.?긴 칼을 빼들고 이불 속에 사람이 숨은 줄 알고 칼로 이불을 찌르더군요.
해방되고 태극기를 장대에 꽂아 높이 달았습니다. 대전도립병원 시절 5병동 책임자로 있을 때 일입니다. 제2방위군사건으로 대구에 젊은이들을 교육한다고 장교 6명이 먹이지 않고 자기네들이 돈을 착복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갔습니다. 공주도립병원에서도 죽었고 하여 나는 오후 5시에 근무가 끝나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밤 12시까지 환자를 돌보다 보면 나도 지쳐 쓰러질 뻔하였지만 젊은 청년이 죽어가니 임종도 도와주어야 되고 갑자기 먹고 싶은 과일도 찾으면 사다주니 그 이튿날은 죽습니다.
신분증을 꺼내 보면 고려대 등의 대학생들입니다. 결국 장교 6명은 총살되었지만 얼마나 큰 죄악을 범했습니까. 그리고 주먹밥을 하루 세 개 주는데 날 보고 배가 고프다고 하소연하여 물으니 하루 반 개만 더 달라고 하여 그렇게 주다보니 하루는 형사가 나보고 식당하고 짜고 쌀을 흥정해 먹었다고 잡으러 왔답니다.
그 형사는 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을 들어보자고 하여 젊은 청년들이 너무 배가 고파 하루 밥 반 덩어리를 원하여 더 주었다고 하니 당신 같으면 그리 하였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공주도립병원 시절 객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몸의 부상을 입고 병원을 찾아오면 돈 없는 학생들을 도와준 일이 있었답니다. 학생들의 누님으로 통한 걸 그 형사도 알았나 봅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청년들에게 영양주사라도 놓아주었으면 그리 많은 학생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 하루 주먹밥 세 개 먹이는 게 고작일 때니 지나간 일이지만 너무나 마음 아픈 일이였습니다.?잘못된 욕망 때문에 대구에서 또한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습니까.
고난의 시기, 기업인의 사회적 기여 더 간절해
겨울이 되니 노숙자 걱정이 되는군요. 큰 기업인들께서 큰 사랑으로 쉼터도 만들어주고 일자리를 주어 그 분들이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나라도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경주의 최부자집 조상님 같은 분이 이 땅에 많았으면 합니다. 만석 이상은 갖지 말라. 그중 천석은 남을 위해 베풀자. 그리고 우리 집에서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10대째 그 유언대로 사니 지금도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께서 어려서부터 인성교육에 힘을 쓰시고 특히 재산이 많은 어머니들은 백화점에서 명품 사재는 시간에 어려운 시설을 자주 방문하여 엄마의 사랑을 모르고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엄마의 사랑으로 안아준다면 좀 더 사회가 밝아지겠지요.
자살자가 세계 1위랍니다. 우리 어머니들께서 큰 사랑으로 주위를 따뜻하게 대하시고 내 자녀, 이웃자녀 관심 있게 보아주시면 그 사랑이 훈훈한 바람을 타고 이웃으로 번져, 죽고 싶은 사람도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회사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을 때 중년부인이 꽃 한송이와 “사장님 힘내세요” 쪽지 한 장에 마음을 돌리고 지금은 여러 나라에 수출하는 큰 회사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 마음 깊이 새기고 죽으면 한 줌의 재가 되는 이 몸과 마음을 비우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고 정치욕심, 재산욕심 다 내려놓고 우리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통일될 때까지 서로 합심하여 도우며 어머니들이 신사임당같이 아름답게 사신다면 평화가 찾아오겠지요.
평화통일 우리 꼭 이룩합시다. 나는 늙은이라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팔십 평생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은 처음입니다.
평양에 병원 세우면 환자 돌보다 죽을 터
정의화 의원이 평양근교의 병원을 세우면 조그만 물꼬가 트이겠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큰 내천이 되어 통일도 되리라 봅니다. 제가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북한에 가서 병든 어린이들을 안아주고 병을 치료해주겠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이신 장기려 선생님이 작고하신지 열세돌이 되었고, 올 9월28일에 탄생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대로 선생님은 어려운 환자를 돌보다 가셨습니다.
고신의료원 창설자이며, 원장으로 계시면서 입원환자가 퇴원할 때 돈이 없어 찾아가면 병원직원이 저녁 식사할 때 가만히 나가라고 하셨답니다. 병원운영이 어렵다고 하니 후진에게 물려주시고 부산진역 옆, 조그만 여인숙을 빌려 청십자병원을 차리고 의료보험까지 만드셨습니다.
80년대 부산 용호동의 수재민·철거민 이주지역에 건강관리소를 차려놓고 어린이 예방접종에서 무료분만까지 도와주었습니다. 부산대 간호학과 졸업반을 지역보건 실습장으로 제공하고 체계적으로 가정을 방문하여 여러 환자들을 치료해 줬습니다. 환자는 무료치료해주고 장학금지급, 공부방 및 도서실을 운영하며 가난한 집에서 못 구하는 참고서까지 비치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청소년들에겐 청심회라는 모임을 갖고 지도를 하였죠. 음성 나환자 마을도 일주일에 두번 방문하였습니다. 류마티스로 잘 걷지 못하는 모성가장을 몇 백만원씩 하는 인조관절수술을 베풀어주어 걷게 해준 일도 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받는 장학금은 어린 마음을 다치게 할까봐 부모님을 불러서 대신 주고 때로는 직원이 가정을 방문하여 장학금을 전달했습니다.?냉장고를 열어보고 부식도 사다드리곤 했답니다.
각자 자리에서 책임 다하면 우리 힘으로 통일 가능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만드시고 모든 백성이 오로지 골고루 잘 살게 하셨기에 역사에 길이 남았습니다. 우리 대통령께서 임기가 1년 남짓 남았는데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임기말 지지율이 80%를 넘었다고 합니다. 우리 대통령께서 모든 정치 욕심 버리고 오로지 어려운 백성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 단 하루라도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는 길을 찾으시면 온 국민이 추앙할 것입니다.
나는 고 육영수 영부인을 존경했는데, 그분은 육영사업에 큰 뜻을 가지셨습니다. 우리 영부인께서도 엄마 품을 모르고 자라는 어린이시설에 방문하시어 따뜻이 안아주시면 커서 그 사랑을 사회를 위해 바칠 것입니다.
부산의 정의화 의원님, 의원님 소원대로 봉생병원 창설자인 김원묵 선생과 장기려 선생님의 고향인 평양 근교에 제3봉생병원을 만드시고 결핵과 비타민 결핍으로 죽어가는 북한 어린이들을 치료해 주십시오.
남한의 제약회사들도 기꺼이 약을 지원해 줄 것입니다. 남한의 어머니들은 밥할 때 쌀 한 줌씩 모아 배고파 우는 북한의 우리 어린이들을 살립시다. 우리 주위에도 아름답게 사시는 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명품을 사기위해 외유를 하거나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명품 사는 그 마음을 바꿔서 북한의 불쌍한 어린이를 돕는데 마음을 쓰시면 내 자녀도 훌륭하게 클 것이고 통일도 앞당길 것입니다. 개성공단도 크게 활성화하고, 북한에는 지하자원이 풍부하니 남한의 두뇌와 북한의 인력을 개발하면 북한 경제가 좋아지고 결국 통일이 되겠지요.
남의 나라가 우리 통일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큰 기업들은 유한양행 창설자이신 유한일 선생님을 본받으시고 서민들의 복지사업에 써주십시오. 요람에서 무덤까지 잘 사는 유럽의 복지 정책이 우리도 이어갈 수 있겠지요.
국회의원들께선 오로지 국민이 잘 살 수 있게 머리를 잘 써주시고 공무원들께서는 옛날의 황희 정승 같이 청렴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면 우리의 법도 올바로 서겠지요.
“80 노구이지만 나부터 돕겠습니다”
내가 80이 넘었지만 건강이 허락하면 제3봉생병원에 가서 돕겠습니다. 연예인들이 미개척지 아프리카를 돕고 있습니다. 정의화 의원께서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다면 연예인들도 많이 합세할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하신 햇볕정책을 칭찬한 미국대사가 있었습니다. 쪽방에서 발도 제대로 못 뻗고 자는 젊은이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작은 아파트를 지어주는 독지가가 많이 나오길 빌어봅니다.
젊은 자살자가 세계에서 제일 많다는 오명도 씻고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봅시다.
올해가 장기려 선생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고 9월28일이 그날이었습니다. 제2의 장기려 선생님이 나오셔서 꿈과 희망을 갖고 활짝 웃으며 사는 세상을 만들기 바랍니다.
활짝 웃으며 사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고 싶습니다.
2011년 12월 1일 이복순 드림
2011. 12. 19 기사 “북한 어린이 도와 통일 주춧돌 놓는게 마지막 소원” 기사를 읽고….
오래 전 80년대에 이복순 선생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기사내용을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이복순 선생님과 연락이 끈긴지 오래되어 찾고 싶었으나 연락처를 알 길이 앖었는데,혹시 이복순 선생님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보내 주실 수 있나요?
오래 전 80년대에 이복순 선생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기사내용을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이복순 선생님과 연락이 끈긴지 오래되어 찾고 싶었으나 연락처를 알 길이 앖었는데,혹시 이복순 선생님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보내 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