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레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이정희 후보께
이정희는 당차고 패기있는 정치 신인이었다. 90년대 학번 대학생들에게는 세상을 향한 선배의 당당한 외침이었고 노동자들에게는 시대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을 것 같은 통로였다.
국회의원이 된 이정희는 종종 소리를 지르며 사지가 붙잡혀 끌려나가기도 했다. 의사당 바닥에 뒹굴며 온 몸으로 구국의 열사와 같은 모습도 보여줬다. 열정이 나라를 뜨겁게 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사건이 발생하면서 불출마를 선언한 이정희는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됐고 대통령선거 후보로 나섰다.
12월4일 저녁,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문재인 후보와 함께 18대 대통령선거 후보 TV토론회에 나왔다. 그간의 이정희가 구국의 열사였든 부정경선의 주인공이든 뭐였든 간에 온 국민이 지켜보고 적어도 관심 갖는 TV 토론회에 나와 아주 오랜 시간 ‘이정희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찾아왔다. 매체가 많다고 해도, TV?생방송 공동 출연 기회란 흔한 것이 아니다.
이번 대선은 유력 후보 2명이 각축을 벌이는 양상이다. 보름 뒤 투표일이지만 아직도 안갯속이다. 아쉽게도 다른 후보들은 당선권과는 멀어보인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주장과 정책이 있다. 유력 후보가 아니더라도 모든 후보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갖춰야 할 자격과 가치관과 태도, 그리고 정책과 주장이 있어야 한다.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이정희 후보는 TV토론에서 얄밉게 굴었다. 공격하고 끌어내리려 안간힘을 썼다. 상대방이 이해되지 않아도 정중하게 묻고 공손하게 경청해야 한다. 그것은 대통령 뿐 아니라 지도자가, 아니 모든 구성원이 서로에게 갖춰야 할 예의다.
특히 후보로서의 정책과 방향을 구체적으로 내놓아야 한다. 토론은 그 형식일 뿐이고, 내용은 자신의 주장이어야 한다. 공격보다도 ‘나의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 방법이 ‘설득적’이라면 더욱 효과적이다.
이정희 후보는 설득적이지 않았다. 떼를 썼다. 상대의 주장은 이정희 후보의 독설에 묻혀 희석됐다. 후보의 정책을 비교해보는 자리에서 거슬리는 독설이 시청자들의 귀에 남았다. 상대를 공격하고 싶었겠지만 국민들이 공격당했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보장한다. 보수와 진보 모두 있다. 어느 한쪽만 우세하다면 민주주의의 위기다. 통합진보당의 진보적 이념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통합진보당의 주장을 펼쳐보일 기회를 이정희 후보는 놓쳤다. 국민들은 집중해서 경청하려는 의도였는데 말이다.
유력 두 후보 사이에서 통합진보당은 공격이 아니라 ‘설득적으로 주장’했어야 했다. 이렇게 미운털만 박혀서는 통합진보당과 국민이 더욱 멀어질 뿐이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친 이정희 후보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