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5일]분노한 지구촌 99% 동시 시위한 날

2011년 “1%위한 사회 바꾸자” 세계 동시시위

2011년 10월15일 지구촌의 분노한 반(反)세계화 시위대가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은 뉴질랜드 오클랜드를 시작으로 서울과 도쿄 등 아시아 도시를 비롯해 런던·베를린·마드리드 등 유럽 도시, 뉴욕 월가와 맨해튼 등 아메리카 대륙에도 ‘보통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5개월전인 같은 해 5월 스페인 마드리드 광장에서 텐트 3채로 시작된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의 시위는 미국 ‘월가 점령’ 시위를 통해 현행 경제·정치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된 뒤 “전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자”는 연대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전세계 ‘동시 시위’는 특별한 지도부도 없이 지난 며칠간 인터넷 사이트(occupytogether.org)을 통해 자발적으로 기획된 것으로, 82개국 1500여개 도시에서 수십만명이 참가했다고 주최 쪽은 밝혔다.

각국 시위대의 요구는 ‘빈부격차 시정’, ‘반원전’(일본 도쿄), ‘정치부패 척결’, ‘수도 민영화 반대’(이탈리아 로마), ‘은행 구제 반대’(독일 베를린), ‘최저임금 인상’(뉴질랜드 오클랜드), ‘아프간전 종식’(미국 뉴욕), ‘비정규직 철폐’(서울) 등 들고 있는 깃발만큼이나 다양했다.

실제 다양한 요구를 지닌 시위대를 결집시키는 것은 ‘1%의 탐욕에 맞선 99%의 저항’이란 구호다. 영국 런던의 한 시위자는 “이젠 충분하다. 우리는 대기업과 은행 시스템의 이해에 기반하지 않은 진짜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외쳤다.

빈부격차에 대한 좌절로 ‘뭉치고 있다’는 표현이 당시 상황을 잘 대변해 줬다. 2008년 금융위기 해결 과정에서 엄청난 국민의 세금이 구제금융으로 투입됐는데도 대다수의 삶은 복지혜택 축소와 치솟는 실업률로 벼랑 끝에 내몰려버린 현실이 있다. 위기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은 무능하거나 ‘1%’의 대변자로 전락해버렸다는 회의와 불신감 또한 깔려 있다.

2006년 한국 서울대학교 ‘개교 60돌’

2006년 10월15일 한국의 서울대학교가 60번째 생일을 맞았다.

서울대의 역사는 문교부가 1946년 경성대학(광복 전까지는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경성법전, 경성공전 등 관·공·사립 학교 10곳을 통합해 국내 최초 국립종합대학 설립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정부가 1946년 8월22일 공표한 ‘국립서울대 설립에 관한 법령’이 서울대의 실질적 출발이다. 경성대학이 있던 동숭동을 중심으로 을지로·종암동·소공동·공릉동 등에 단과대학별로 흩어져 있던 서울대는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해 종합대학 성격을 더욱 강화했다. 2003년에는 수원의 농업생명과학대학과 수의과대학까지 이곳으로 이사했다. 지금은 의대만이 연건캠퍼스에 남아 있다.

서울대는 60 돌 당시까지 학부 졸업생 18만2000여명과 석사 6만4000여명, 박사 1만6000여명을 배출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한국 사회 학벌주의와 패거리문화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서울대 폐지론 등 비판론도 나오고 있다.

2012년 10월15일 서울대학교는 미수(美壽), 곧 창립 66돌을 맞았다. 사람으로 치자면 아름다운 나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해말 치러질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한 후보는 “서울대학교를 세종시로 옮기겠다”고 공약했다. 무릇 아름다움은 다툼과 갈등을 낳는 모양이다.

2003년 중국 첫 유인우주선 선저우 5호 발사

2003년 10월15일 오전 9시(현지 시각) 정각 중국 최초의 유인(有人) 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가 발사됐다. 10분 후 지구 궤도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이 옛 소련과 미국에 이어 세계 3번째로 사람을 태운 우주선 발사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3개의 모듈로 구성된 선저우 5호는 이날 중국 북서부 간쑤성 주취안 위성발사기지에서 양리웨이(楊利偉.38) 중령 한 명만을 태우고 창정 2-F 로켓에 실려 발사된 후, 로켓에서 분리돼 고도 200~350㎞의 지구 타원 궤도로 진입했다.

고도 343㎞ 지점으로 옮겨가 지구를 14회 선회한 후, 16일 오전 6시 네이멍구 자치구 쓰쯔왕치의 초원으로 돌아왔다.

1990년 고르바초프, 노벨평화상에 선정

1990년 10월15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벨위원회는 동유럽의 개혁을 선도하고 냉전종식에 기여하는 등 국제평화의 진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고르바초프를 1990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뽑았다고 밝혔다.

고르바초프는 1901년 노벨평화상이 제정된 이래 공산당원으로서나 공산국가 지도자로서는 처음 이 상을 수상하게 됐다. 또 강대국 지도자로서는 1906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1919년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다.

1934년 중국공산당 대장정 시작

“대장정은 11개 성, 2억에 달하는 인민들에게 홍군이 걷는 길만이 해방을 향한 유일한 길임을 알리는 일이었다. 대장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홍군이 이루려는 위대한 진리가 무엇인지 인민들에게 알릴 수 있었겠는가?”-마오쩌둥-.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1934~35년)을 그린 웨이웨이의 역사소설 <대장정>(5권·송춘남 옮기·보리출판사)에 실린 선야오이의 삽화.

1934년 10월15일 새벽 중국 남부 강서성 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 아직 걷히지 않은 어둠을 뚫고 8만명의 중국 홍군(공산당 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1년 전부터 70만여명의 대군으로 소비에트 주위에 철조망과 시멘트 요새를 설치,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치면서부터 탈출은 예고됐다. 국민당 군의 압박으로 소비에트 지역이 점점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강서와 복건성 일대의 근거지를 버리고 중국 서북부의 오지인 섬서성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 군과 각 지역의 적대적인 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입은 2만명을 포함한 2만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다.

마오쩌뚱(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주더(朱德, 1886~1976), 린뱌오(林彪, 1907~1971),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등이 이끄는 홍군이 1935년 10월 연안에 도착해 자리를 잡기까지 행군한 거리는 무려 9600km.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000명 뿐이었다. 대장정은 중국 공산당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기록됐다. 홍군은 대장정을 통해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을 여로에서 만난 농민 등 중국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파했다.

그 결과 돈과 군대는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드넓은 농토와 농민들은 홍군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민심을 잡은 홍군은 1945년-1949년까지 이어진 국공내란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가난한 농민의 대표자로써 중국 정권을 담당하는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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