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7일] 시진핑 차기 지도자 확정된 날(2010년)

2010년 G2시대 연 중국, 차기지도자에 시진핑


2010년 10월17일 향후?
‘중국’을 이끌 차기 지도자로 시진핑(당시 57세) 국가부주석이 사실상 확정됐다.?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급부상, 금융위기 이후 급속히 쇠퇴한 미국과 더불어 세계 양대 강대국으로 우뚝 서는 시점에 선정된 차기 지도자의 이름은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시 부주석은 이날부터 시작된 17기 5중전회에서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2012년 후진타오 국가주석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아 5세대 지도부를 이끌게 된 것이다.

중국은 이때부터 2012년까지 차기 지도부 재편을 위한 복잡한 정치게임을 예고했다. 시 부주석은 이듬해 시작된 12·5 경제계획에 제시된 ‘국부에서 민부로, 성장에서 분배로, 세계의 공장에서 첨단산업 강국으로’라는 미래 중국의 청사진을 실현할 과제를 안고 공식적인 지도자 수업을 시작했다.

2005년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인 바진(巴金) 사망

2005년 10월17일 오후 루쉰에 버금가는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인 바진(巴金)이 악성중피세포종양과 6년 동안 투병해온 끝에 향년 101세로 사망했다. 해체되는 중국의 전통적 가문을 묘사한 대표작 ‘가(家)’로 유명한 그는 20세기 초 중국 사회의 후진성과 사회적 불평등의 해결책으로 ‘막스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꼽았다. 여러 편의 장·단편 소설로 1930~40년대를 풍미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차례 물망에 올랐다.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의 봉건 지주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리야오탕(李堯棠). 유교 교육과 근대적 외국어 교육을 함께 받았다. 어린 시절의 상류층 경험은 역설적으로 그가 허위적 봉건예교의 억압성과 착취 속에 신음하는 하인 등 노동계급의 비참한 삶에 착목할 계기를 제공, 나중에 그의 문학적 밑거름이 됐다.

1919년 5·4운동을 계기로 혁명운동에 눈떴으며, 2년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와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다. 1929년 유학 중에 발표한 첫 번째 소설 ‘멸망(滅亡)’은 그를 선구적 작가 반열에 올려놨다. 바진은 필명이다. 그가 존경한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의 첫 음절과 크로포트킨의 마지막 음절을 따서 작명한 것이다.

1936년 루쉰이 이끄는 혁신적인 문청집단에서 활동한 그의 작품은 뛰어난 문학성을 잃지 않으면서 착취계급을 명징하게 고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바진은 무정부주의를 따르긴 했지만 애국심도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후 10여년 동안 정치적으로는 방관자로 지냈지만 이후 항일전선에 뛰어들었다. 이 때문에 중국 문단에서 ‘중국의 양심’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2년 한국전쟁 당시에 ‘전장창작조’ 조장으로 한반도 전선을 거쳐가기도 했다. 바진은 특히 덩샤오핑(鄧小平)과 같은 쓰촨성 출신인 데다 나이도 동갑이어서 덩샤오핑 생존시 각별한 친분을 나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50년대 말 자신의 무정부주의적 사고방식을 공식적으로 포기했지만, 문화혁명기에는 ‘부르주아’ 작가로 몰려 홍위병들로부터 심한 고초를 겪었다. 지난 197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면서 복권됐고 2003년에는 중국 문인 최고 영예인 ‘인민작가’ 칭호도 부여받았다. 중국작가협회 주석, 중국 펜클럽 회장, 정치협상회의 부주석도 역임했다.

1983년 젊은 시절 유학했던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멸망’을 비롯, 그를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은 ‘가’ ‘봄’ ‘가을’의 ‘바진 3부작’ 등 100여편의 장·단편을 남겼으며 14권의 ‘바진 문집’과 26권의 ‘바진 전집’이 출간돼 있다. 1995년에는 91살의 나이에 ‘신은 없다’라는 작품을 발표해 그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대표작인 장편소설 ‘가’는 한국에도 번역, 소개돼 있다.

말년에 파킨슨씨 병으로 고생했으며 인후관 절제 수술 이후에는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가족과 의사들에게 안락사를 요구했다고 한다.

1992년 첫 ‘세계 빈곤퇴치의 날’

1987년 10월17일 세계인권선언이 발표(1948년)된 장소이기에 ‘인권광장’으로도 불리는 프랑스 트로카데로 광장에 10만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여들었다. 평생을 빈곤퇴치운동에 바친 조셉 레신스키 신부(당시 70세)가 주도한 ‘절대빈곤퇴치운동 기념비’ 개막행사를 위해서다.

이렇게 빈곤과 폭력ㆍ기아의 희생자들을 기리고 빈곤탈출만큼 중요한 인권신장은 없다는 목소리를 드높인 지 5년 만인 1992년, 유엔은 매년 10월17일을 ‘세계 빈곤퇴치의 날’로 정하고 절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제적인 노력을 할 것을 결의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1973년 10월17일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10개국이 석유의 정치적 무기화를 선언했다. 하루 전 날인 10월16일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가 17% 인상 결의한 지 하루만에 취해진 조치였다.

열흘 전인 10월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 점령지 골란고원과 시나이반도로 진격하며 시작된 제4차 중동전, 6년 휴전을 깬 이 전쟁에 미국 등 서방사회가 가세하자 아랍은 신병기 석유를 앞세운다. 이른 바 ‘제 1차 석유파동’의 신호탄이었다.

중동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와 팔레스타인인의 권리회복까지 매달 산유량을 5%씩 감축하고 20개월째인 1975년 5월에는 원유생산을 완전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바로 다음날 사우디아라비아가 대미 석유전쟁을 선포하며 실천에 들어간다. 친이스라엘 서방국가에 대한 석유공급 중단은 시간이 갈수록 위력을 발휘했다. 미국에서는 주유소가 문을 닫고 휘발유 배급제를 도입했으며 산업유 부족에 영국은 주3일근무제까지 실시했다.

껑충거리는 석유가격에 물가도 덩달아 올랐다. 1974년 3월19일 석유금수 해제 선언까지 세계경제는 불황과 인플레이션으로 고통 받았다.

석유파동은 무엇보다 유가를 급등시켰다. 1960년대 초 배럴당 1.29달러이던 것이 1973년 말에는 11.65달러로 치솟았다. 당시 한국에서도 멀쩡한 자동차를 길가에 버리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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