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4일] 130주년 맞는 오리엔탈 특급열차 첫 운행한 날
2010년 제주도 ‘유네스코 3관왕’
2010년 10월4일 제주도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받았다. 이로써 제주도는 2002년 12월 생물권보전지역 승인, 2007년 2월 세계자연유산 등재에 이어 유네스코가 주관하는 ‘3대 환경보호제도’에 모두 등재·인증되는 ‘영예’를 얻게 됐다.
유네스코는 이날 새벽 그리스 레스보스섬에서 열린 유럽 지질공원망(Global Geoparks Network) 총회에서 제주도를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했다. ‘제주섬’은 나라 안팎에서 학술적·경관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유네스코의 3대 환경보호제도에 모두 등재·인증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제주도 세계지질공원의 대표 명소로 인정된 곳은 한라산과 성산 일출봉, 만장굴, 천지연폭포, 패류화석 서귀포층, 주상절리대, 산방산, 용머리해안, 수월봉 등 9곳이다. 제주도는 2019년까지 23곳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생물권보전지역 승인과 세계자연유산 등재는 자연환경의 ‘보호’에 강조점을 둬 각종 행위를 제한하지만, 지질공원 지정은 환경보호와 지역경제 증진을 동시에 목표로 하기 때문에 행위 제한을 두지 않는다.
2009년 ‘남미 민중가수’ 메르세데스 소사 타계
2009년 10월4일 오전 전설적인 아르헨티나 민중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숙환으로 숨졌다. 향년 74세. 소사는 한 달 전인 9월18일부터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병원에서 신장과 폐질환으로 집중치료를 받아왔다.
소사는 1935년 7월9일 투쿠만주 산미겔에서 태어났다.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음악 혁명인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을 이끈 대표주자다. 소사는 60년대 남편 마누엘 오스카 마투스의 도움으로 데뷔 앨범을 발표한 뒤, 65년 코르도바시에서 열린 음악 페스티벌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진보주의 활동가이기도 한 소사는 76~83년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 시절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특유의 칠흑 같은 머리 때문에 ‘라 네그라’(검은 여인)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생전에 40장의 앨범을 낸 그는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영국 가수 스팅, 미국 가수 조안 바에즈부터 라틴계 가수인 샤키라와 카에타노 벨로조, 후안 마누엘 세라 등 다양한 음악인들과 함께 작업했다.
1994년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대성당에서 공연했고, 2002년 뉴욕 카네기홀과 2004년 로마 콜로세움 공연은 전석 매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07년 북한 태권도 시범단, 사상 첫 미국 입국
2007년 10월4일 배능만 조선태권도위원회 부위원장이 이끄는 북한 태권도 시범단 18명이 미국 로스앤젤레스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북한 태권도인들이 미국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범단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우진 태권도타임스 발행인과 LA공연 책임자인 유병용 워너브러더스 부사장 등 100여명으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은 뒤 숙소로 이동해 여장을 풀었다. 선수 13명을 비롯해 임원 및 통역 등으로 구성된 시범단은 베이징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LA에 도착했다. 13박14일 일정으로 미국에 머무르면서 다양 시범행사를 보여줬다.
1990년 한국의 군인 윤석양 이병 ‘보안사 사찰’ 폭로
1990년 10월4일 한국군 보안사령부에 복무 중 탈영한 윤석양 이병(한국외국어대 노어과 4년 제적)이 서울 연지동 서울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국국보안사령부가 정치인-종교인-언론인-교수-재야인사 등 민간인 1300명을 대상으로 정치사찰과 동향파악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윤이병은 동향파악 대상자 색인카드 1300여장, 개인신상 서류철 4개, 개인별 동향을 수록한 플로피디스크 30장 등을 증거물로 제시했다.
윤석양은 당시 ‘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 사건에 연루돼 국군보안사(현재 기무사령부)에 연행된 후 강제로 대공 및 학원사찰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윤석양은 정부가 정치, 노동 분야 등의 주요 인사들과 민간인을 상대로 정치 사찰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윤석양은 정치 사찰 대상 명부를 가지고 탈출, 이를 언론에 폭로했다.
이 폭로로 정치권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전국적인 규탄대회가 이어졌다. 이에 정부는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고 이상훈 국방장관을 해임하고 조남풍 보안사령관을 대기발령하는 등 문책인사를 단행했고 윤이병이 근무한 보안사 서빙고분실은 그 해 말 폐쇄했다. 보안사 명칭도 이 사건을 계기로 1991년 1월1일부로 국군기무사로 변경했다.
당시 명부에 포함된 노무현 전 대통령 등 145명은 1991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보안사가 헌법상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점을 인정, 원고들에게 각각 200만 원 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윤석양 이병은 1990년 KNCC인권위원회가 수여하는 인권상을, 1995년 ‘올해의 인권상’을 각각 수상했다.
1957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
1957년 10월4일 소련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를 발사했다. 지름 58㎝,무게 83.6㎏에 4개의 안테나가 달린 조그마한 공 모양의 위성이었다. 소련은 그해 11월3일 개를 탑승시킨 스푸트니크 2호를, 그 이듬해 5월15일 스푸트니크 3호를 연이어 발사했다.
미국은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즉각 인공위성 계획을 발표하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출범시켰다. 1958년 1월31일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 올렸으나 소련은 더욱 앞선 기술을 선보이며 미국을 압박했다. 달까지 날아간 첫 인공위성 루나 1호(1959년 1월), 인류 최초의 우주인(1961년 4월), 여성 우주인(1963년 6월) 탄생도 소련이 먼저였다.
그러나 1969년 7월20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 우주경쟁에서 미국이 소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1883년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첫 운행
1883년 10월 4일 프랑스 파리 스트라스부르 역에서 수 백 명의 환송 속에 장거리 국제열차 ‘오리엔트 익스프레스’가 지평선 끝을 향해 출발했다. 파리를 떠나 루마니아 지우르지우를 거쳐 터키 이스탄불까지 첫 운행에 나선 특급열차에는 저명인사 40명이 타고 있었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벨기에인 조르주 나젤마케르는 신형 침대차를 보고 감동해 귀국 후 유럽 지형에 맞는 컴파트먼트(작은 방에 3, 4개씩의 자리가 마주보고 있는 형태)식 침대 차량을 개발했다. 특급열차는 새로운 사교장으로 떠올랐다.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파리로부터 동쪽으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터키 이스탄불까지 운행했고,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밀라노, 베네치아, 트리에스테까지 노선을 확장했다. 이어 스위스 취리히,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를 지나 그리스 아테네까지 가는 노선을 추가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잠시 운행이 중단되기도 했던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는 1930년대가 최전성기로 꼽힌다. 특급열차의 단골이었던 왕족, 귀족, 외교관, 사업가들은 24시간 서비스를 제공하는 침대차와 수준 높은 식당차를 즐겨 이용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무대로 등장하면서 이 기차는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노선을 줄여나가다 1977년 5월 19일 파리∼이스탄불 노선 운행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그 뒤 오랜 동면에 빠졌던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는 1982년 미국인 실업가 제임스 셔우드에 의해 새로 부활했다.
오늘날에도 런던∼베네치아 구간을 운행하는 ‘베네치아 심플론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와 태국 방콕∼싱가포르를 연결하는 동남아시아의 ‘이스턴 & 오리엔탈 익스프레스’가 달리고 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