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7일] 2003년 최초의 6자 회담 베이징서 개최
2011년 대구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서 케냐 금은동 싹쓸이
2011년 8월27일 당시 한국의 대구에서 열렸던 제13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마라톤 종목에서 장거리 왕국 케냐의 선수들이 금·은·동을 모두 차지했다.
케냐의 에드나 키플라갓(당시 32세)은 이날 오전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출발해 시내를 도는 코스에서 열린 여자 마라톤에서 2시간28분43초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에 도착했다. 키플라갓은 5000m와 10000m 선수로 활약하다 31살의 늦은 나이에 마라톤으로 전향했다. 7세와 3세의 아들을 둔 아줌마다. 남편도 중장거리 육상선수 출신이다. 키플라갓은 마라톤을 시작한 지 1년만인 지난 4월 런던마라톤에서 올 시즌 3위 기록인 2시간20분46초를 기록해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로 주목받았다.
키플라갓에 이어 2위와 3위도 케냐의 프리스카 제프로와 샤론 체로프가 차지했다. 케냐는 5명의 출전선수 가운데 상위 3명의 기록합산으로 결정되는 단체전에서도 우승을 확정했다.
우승자 키플라갓의 기록은 폴라 래드클리프(영국)가 2003년 작성한 세계기록 2시간15분25초에는 크게 모자랐다. 자신의 최고기록인 2시간20분46초에도 한참 모자라는 기록이었다.
경기가 열린 27일 대구는 비교적 선선한 날씨였으나 습도가 80%가 넘는 상황이어서 선수들의 레이스가 쉽지 않았다. 또한 경기 초반 출발신호가 오작동해 선수들이 혼선을 빚었고, 평탄한 코스에서 순위를 가늠하는 눈치싸움도 심하게 벌어져 좋은 기록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2010년 몽골 정부, 사막에서 국무회의 열어
2010년 8월27일 몽골 정부는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할 목적으로 몽골 고비사막 남쪽 모래계곡인 가쇼니 헐러이에서 국무회의를 개최했다. 국무위원들은 국무회의 참석을 위해 15시간 동안 4륜구동 지프를 타고 이동했다.
장관들은 정장차림에 ‘지구를 구하자’라고 쓰인 짙은 녹색 야구모자를 쓴 채 1시간 동안 회의를 진행했다. 몽골 정부는 “5년 전만 해도 수많은 식용식물들이 자랐던 이 계곡이 현재 모래로 완전히 뒤덮여버렸다”면서 기후변화에 따른 사막화를 경고했다.
2003년 베이징에서 열린 첫 6자 회담
2003년 8월27일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과 러시아, 미국, 북한 등이 참가한 6자회담이 최초로 개최됐다. 6자회담은 차관급 수석대표로 합의돼 우리나라에서는 외교통상부 차관보, 북한 외무성부상,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중국 외교부 부부장, 일본 외무성 아시아태평양국장, 러시아 외무부 차관 등이 참가했다.
본회담은 댜오위타이 제17호관 팡페이웬에서 실시됐다. 본회담에서 중국은 방 입구에 자리하고 시계방향으로 한국과 러시아, 미국, 북한, 일본 등의 순서로 배치됐다.
본회담 인사말은 중국을 필두로 국명 알파벳 순, 시계방향인 중국, 북한, 일본, 한국, 러시아, 미국 등의 순으로 진행됐고, 기조연설은 알파벳 역순으로 실시됐다.
참가국들은 북핵의 평화적 해결, 6자회담의 지속 개최 원칙 등에 합의했지만 공동발표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첫 6자회담은 지난 2003년 8월29일 의장의 구두발표 형식으로 이뤄진 의장요약발표문으로 종결됐다.
1992년 한국 주재 중국 대사관 개관
1992년 8월27일 한국 주재 중국대사관이 개관했다.
한국과 중국은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과 더불어 냉전체제로 인해 정치적 적대관계가 유지됐고, 경제적 단절도 지속됐다. 지난 1970년 후반 간접교역으로 경제 교류를 개시했던 중국은 민간 교류만 허용하다가 우리나라와 지난 1990년 무역대표사무소 개설에 합의했다. 또 지난 1992년 8월 양국은 수교의정서를 교환하고,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해 상호 간 대사관을 개설했다.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국가주석 등과 회담을 개최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각각 중국을 찾아 한중 협력동반자관계를 구축키로 했다. 한국은 1990년대 들어 중국에 대한 투자가 급증해 제1위 투자 대상국이 됐다. 지난 1997년 당시 중국은 농산물, 섬유류, 광산물 들을 우리나라에 수출했고, 철강, 기계류, 운반용 기계 및 화공제품 등을 수입했다.
2012년 수교 20년째를 맞는 한중 양국은 20년 사이에 교역규모가 35배나 성장했다. 한중 교역규모는 한중 수교 원년인 지난 1992년 63억8000만 달러에서 2011년 2206억2000만 달러로 35배나 늘어난 것이다.
1992년 9만 명에 불과했던 중국 관광객 수는 한류열풍과 함께 지난해 222만 명으로 25배 증가했고, 중국 최대 신용카드인 은련카드의 한국 내 결제금액은 최근 5년 사이에 65배나 늘었다.
1966년 홍위병, 中다싱현 집단학살
1966년 8월27일 붉은 완장을 찬 수천 명의 젊은이가 중국 베이징(北京) 남부 다싱(大興) 현에서 4류 분자(지주, 부농, 반혁명세력, 악질분자) 척결을 명분으로 광기(狂氣)어린 살육의 잔치를 연출했다. 6일간의 학살로 태어난 지 38일된 유아부터 80세 노인까지 325명이 사망했다. 또 22가구는 전 가족이 몰살당했다.
1966년 당시 72세였던 마오쩌뚱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수정파의 득세로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 결과 국가의 정치구조와 전 국민의 사회생활,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통째로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4구(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 타파’를 내세우며 사회 전체에서 봉건주의와 자본주의를 걷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거기에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존 권위에 반기를 들라”는 마오쩌뚱의 구호에 학생들이 가장 앞장 서 호응을 보였다. 같은 해 5월 베이징대에 “혁명지식인들은 모두 (혁명)전투에 참가하자”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자 마오는 “1960년대 베이징의 코뮌 선언”이라며 환호를 보냈다.
들불처럼 전국의 학교에 혁명조직이 결성됐다. 8월18일 수백만 명의 청년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몰려들었다. 붉은 완장을 찬 채 톈안먼 위에 올라선 마오는 어린 학생들에게 ‘정치적 세례(洗禮)’를 했다.
젊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반발하자 마오는 1967년 홍위병의 해산을 명령했고, 해산하지 않는 지역에는 정규군을 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