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한지(Korean Paper, 韓紙) 만드는 과정은 녹록치 않다. 오죽하면 100여 가지 공정을 거치므로 백지(百紙)라고 할까.
바람이 매서워지는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닥나무를 꺾어 증기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든 가마솥에서 삶아 껍질(흑피)을 벗겨내고 다시 겉껍질을 벗겨낸 백피(白皮)를 잿물에 삶아 표백을 한다. 잡티를 골라내고 씻어서 두들기면 섬유질이 풀어진다. 이를 물과 닥풀(황촉규)에서 추출한 점액을 섞어 휘휘 저어주면 크고 작은 닥나무 섬유질이 고르게 침전돼 지질도 고르다. 특수하게 제작된 뜰채로 이 혼합액을 떠 섬유질이 고루 펴지게 한 뒤 고른 평면 위에 펼치고 말려 평탄작업을 하면 한지가 완성된다.
한국에서는 전주와 안동, 원주에서 생산되는 한지가 유명하다. 한국 정부는 한지를 중요한 문화관광 상품으로 복원해 세계에 알리는 데 적잖은 노력을 벌이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유럽 등지에서, 지난해에는 미국 뉴욕에서도 ‘한지문화제’를 열었다.
서구 각국에서 한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예쁜 색깔의 한지가 지구촌 곳곳에서 미술공예용 재료나 포장재료, 기타 용도로 이미 많이 팔리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종이의 기원은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다. 중국의 채륜이 만든 종이가 종이의 중시조인데, 이 종이가 당시 삼국시대였던 한반도에 전파됐다. 또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과 아메리카 등 전 지구촌으로 전파됐다. 그 뒤 산업혁명 등으로 기술발전을 주도한 서구유럽 국가들에서 종이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 다시 중국과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까지 전해진다. 이른 바 양지(洋紙)다.
양지가 국민경제에 보편화 된 뒤에도 한지는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22일 강원도 원주시 무실동 한지테마파크에서 만난 김동신 체험팀장은 “손으로 직접 만드는 한지는 통풍과 채광이 잘되고 오래 보존된다”면서 “지금 만드는 원주 한지도 750년 보존된다”고 말했다.
김팀장은 또 “한지는 ‘종이뜨기’를 할 때 ‘앞물(전후)’과 ‘옆물(좌우)’을 두루 거치므로 더 고르게 한지가 펴지는 특성 때문에 재질이 더 촘촘하고 튼튼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손으로 직접 한지를 만드는 과정을 체험하는 관광 상품으로 가치가 높고, 자신이 직접 제작하거나 전문가가 만든 한지공예품은 여행객들이 선호하는 상품”이라고 덧붙였다. 원주 한지테마파크도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외국인 단체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실크로드(Silk Road)’가 동서양의 문물을 교류하는 주요 교역로였다면, ‘페이퍼로드(Paper Road)’는 동양문명의 우수성이 서양으로 건너가 진화한 다음 다시 동양에 전파돼 전 지구적으로 문헌정보와 정보통신 문명을 교류하는 ‘꽃길’이었다.
한지테마파크 역사관에서 종이가 인류문명에 기여한 엄청난 가치에 새삼 입을 다물지 못하고 도취된 기자를 현실 세계로 되돌아오게 한 것은 한 중학생이 무심코 한 한 마디 말이었다. “만드는 과정이 신기하긴 한데, 닥나무의 대부분을 버리고 얻은 약간의 ‘종이’를 보니 좀 허무해요.”
생각해보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종이는 어느덧 생필품의 시대를 마감하고 사치품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