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이훈우 전 한겨레 제작국장 5·18유공자 인정 5.18묘지 ‘이장’
최근 5·18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사후 인정받은 고 이훈우 한겨레신문사 전 제작국장의 안장식이 5월 12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제2묘역에서 열렸다. 이훈우 전 국장은 1953년 12월 7일 전남 보성군에서 태어나 광주서중과 광주일고 졸업 후 1973년 전남대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학창 시절 동아리 ‘광랑’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족사회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연구회’는 농촌이 해체되고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회모순, 빈부격차, 도시빈민 등의 문제를 연구했다. 고인은 각 대학 사회과학 동아리의 연락책으로도 활동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광주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으로 자살을 시도 후 사흘 만에 깨어났다. 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훈우 전 국장은 80년 5월 18일 예비검속에 걸려 체포 구금되었으며, 석방 후 82년 여수, 광주에서 학원강사를 하면서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 동료와 후배들을 챙겼다. 1982년에는 황석영과 김종률 등 선후배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작에 참여해 테이프 녹음을 도맡는다.
그는 같은 해 여수에서 만난 박두리와 결혼 후 롯데제과 영업 사원을 거쳐 90년 한겨레에 입사해 제작국장과 경영지원실장 등을 지냈다. 아들 이의강, 딸 이유라가 있다.한편 이날 안장식에는 유족, 신문사 동료, 친구, 학교 동문 등 30여명이 참석하여 고인이 제작에 참여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며 가신 이를 추모했다.
다음은 고인의 친구인 양태열씨의 추모사 전문.
훈우야. 이제야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자리를 찾아가는구나. 이 땅에 민주, 정의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영면에 들 수 있으니 정말 네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것 같다.
광주의 한과 얼이 함께 하고 있는 이곳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그동안의 고통과 한이 쌓여 병마로 바뀐 중에도 이에 개의치 않고 씩씩하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겠다고 하던 네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아마도 잘못된 소식이라 여기며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가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 데 벌써 3년 3개월이라는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갔구나.
큰 덩치만큼이나 선이 굵었기에 한겨레신문사 재직 시 많은 후배들이 너를 따랐으며,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도 의연한 모습으로 너보다 다른 이들을 걱정하고 더 챙겼다는 이야기는 너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또 후배들이 누구보다 더 널 따랐다는 사실이 남을 위한 배려가 일상화된 너의 품성을 말해주고 있다.
함께 자랐던 고등학교 시절, 오적 사건으로 우리가 학교에서 불온한 동아리로 폄하되었을 때도 너는 우리가 자신 있으면 되는 것이지 외부의 시선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사내의 자세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역설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농촌봉사활동을 가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너의 모습에 우리 모두는 게으름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길동이가 유명을 달리하였을 때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그를 보내는 일에 앞장서서 모든 일을 추슬러 나가는 너의 처사를 보면서 깊은 우정에 감탄하였다.
학원 강사생활을 하면서 남들 모르게 운동권 후배들을 돕고, 또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의 복판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그러면서도 우쭐해 하거나 교만하지 않은 너의 모습은 여러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하겠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대동세상을 위해 잘 나가던 롯데를 그만두고 미래가 불확실한 한겨레라는 신생 언론사로 뛰어 들어간 너의 행동은 우리가 쉽게 따라 하기 힘든 결단이었다.
네가 캄캄한 질곡의 어둠 속에서 황석영 님, 김종률 님 등과 함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남긴 것을 우리 모두에게 ‘산자’의 도리를 다하라는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세상의 헛것보다는 진정한 대동세상을 위해 노력하라는 큰 뜻을 담아내는 너의 염원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너의 염원과 달리 아직도 진정한 민주는 멀고 독재와 불의, 탐욕으로 주머니를 채운 어둠의 자식들이 횡행하고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너의 뜻과 너의 혼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전진을 계속할 것이다. 산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아직도 맑은 눈을 가진 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분노보다 웃음을 먼저하고, 비관보다 희망과 낙관을 앞세우며 용서와 사랑을 일상으로 살아온 너였기에 너의 공백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비록 고통 가득한 것이었을망정 서로를 보듬고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왔기에, 혼자 가는 길이 아니었기에, 힘도 되고 격려도 되었다. 너의 밝음이, 너의 시원시원함이 우리들의 우정에 윤활유가 되었다.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망각과 죽음이라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에 대한 기억이 우리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고 오래오래 계속되었으면 한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민주의 확립을 위한 너의 노력과 함께 또 너의 맑은 미소와 함께. 이미 한번 내려놓은 삶이지만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함께 정말 평안한 안식을 가지기를 바란다.
이 곳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네가 그리울 때면 누구나 열린 마음으로 수이 다가올 수 있는 이곳에서.
네가 정말 그립다.
2024. 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