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일] 일본의 한중연대 파괴공작 ‘완바오산’ 사건

2009년 영화 ‘M 버터플라이’ 실존인물 스페이푸 사망

2009년 7월2일 영화 ‘M 버터플라이’의 실존인물 스페이푸가 프랑스 파리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70세.

섬세한 외모의 중국 스파이인 스페이푸와 그를 여자로 오인하고 사랑에 빠져 기밀자료를 넘긴 프랑스 대사관 직원 버나드 브리스코의 이야기는 1988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고 1993년엔 영화 ‘M 버터플라이’로 제작됐다.

영화는 고위 외교관인 브리스코가 1964년 중국 경극을 보러 갔다 여장남자 배우 스에게 매혹된 것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 당시 브리스코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20세 청년이었다. 신설된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 경리사무원으로 취직한 브리스코는 이후 스와 연인으로 발전해 베이징 대사관에서 기밀서류를 넘겨줬다. 1986년 간첩혐의로 6년형을 선고받은 두 사람은 1년 뒤 사면됐다.

2000년 멕시코 정권 교체하는 날

2000년 7월2일 실시된 멕시코의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국민행동당의 비센테 폭스 후보가 집권여당인 제도혁명당(RPI)의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물리치고 임기 6년의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로써 지난 1929년 이후 71년 동안 계속돼 온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체제가 무너지고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300년에 걸친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멕시코는 30년 동안의 군벌출신 1인 장기독재를 거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해 있는 중도 좌파 정당 제도혁명당이 장기집권을 해 왔다.

폭스 당선자는 코카콜라 멕시코 현지법인 영업사원 경력의 비즈니스맨 출신으로 정치에 입문한 지 13년 만에 수직상승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역사는 순환하는 것인가. 그로부터 12년 뒤인 2012년 7월2일 제도혁명당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 후보가 38%대의 득표율로 1위에 올라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7년 타이 ‘바트’화 폭락

1997년 7월2일 타이 정부가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이 나라 ‘바트’화 가치가 폭락했다. 발표 직후 싱가포르 외환시장에서 바트화는 곧바로 대량 투매가 이뤄져 전날보다 20% 떨어진 달러당 29.50바트에 거래돼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바트화 폭락에 따른 타이의 금융위기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 인접 동남아시아 국가로 번져갔다. 타이는 결국 IMF로부터 174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뒤 금융개혁과 긴축정책으로 힘겨운 경제회생에 돌입했다.

1994년 월드컵 자살골 선수 피살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실점을 기록했다는 이유만으로 고국 콜럼비아에 돌아와 피살당한 안드레스 에스코바르(Escobar_Andr?s)

1994년 7월2일 당시 월드컵 경기가 한창이던 콜롬비아 동북부 메델린시의 한 나이트클럽 밖 주차장에서 콜롬비아 축구대표팀 주전수비수인 안드레스 에스코바르(Escobar, Andr?s?당시 27세)가 12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괴한들은 총을 쏘면서 “골, 골, 골”이라고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월드컵에서 자책실점을 기록했다는 이유만으로 고국에 돌아와 이렇게 총탄세례를 받았다.

에스코바르는 94년 미국월드컵 축구대회 미국과의 대결에서 팀의 1-2 패배를 부른 자책골을 허용했다. 그는 미국의 존 하크스가 콜롬비아 골문 앞으로 찔러 넣은 공을 걷어내려다 그만 공이 자기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이 일로 콜롬비아는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전쟁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스포츠가 외려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광기를 자아내는 기막힌 시대다.

1976년 베트남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SRV) 출범

1975년 7월2일 북 베트남군의 공세로 남베트남 정권은 무너지고 전국토의 통일을 선포, 국호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RV)으로 발표했다. 1954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분단 된지 20년만에 통일 베트남 시대를 맞은 것이다.

북 베트남의 지휘 조정을 받고 있던 남 베트남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임시혁명정부(PRG)지도자들은 독자통치를 구상하고 있었지만, 북 베트남 정치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1976년 4월 25일 남북 통일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6월24일 하노이에서 열린 국회에서 하노이 당국자들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고, 7월2일 세계만방에 사회주의 베트남을 선언한 것이다.

1931년 중국 완바오산에서 한·중 농민 충돌

만보산사건 기념비(萬寶山事件紀念碑)

1931년 7월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완바오산[萬寶山] 지역에서 조선과 중국 두 나라 농민 사이에 수로를 둘러싼 분쟁인 ‘만보산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조선의 많은 농민들이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만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931년 4월 창춘(長春)에서 서북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완바오 산 지역의 미개간지 약 3ha를 이승훈 등 조선농민 8명이 10년 기한으로 조차계약을 맺은 뒤 수로공사를 진행하자 인근의 토착 중국 농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영사관이 중국 농민측의 불만은 무시한 채 조선 농민들을 교활하게 조종하면서 공사를 강행하라고 부추겼다. 그 결과 중국 농민과 조선 농민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일제는 특무기관에 조작기사를 제공, <경성일보>에 사건이 대대적으로 확대 보도되면서 심화됐다. 조선에서 반(反)중국적 감정이 유발돼 인천·평양·서울 등지에서 수천 명의 한국인이 중국인을 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태는 <동아일보>가 “만보산 사건은 별로 대단하지 않은 것”이라는 취지로 보도하자 비로소 사태가 수습됐다.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반(反)중국인 감정으로 쏠리게 해 한·중 양국민의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려는 일본의 의도가 잘 드러난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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