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버지’…”‘있으되 없었던’ 아버지와 ‘나와 동거하는’ 아버지”

“(전략) 그 아버지가 태어나신 날이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나는 어제 많이 울었다. 아버지가 생긴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지금도 눈물이 난다. 나는 이제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다. 보호자가 있는 사람이다.”(본문 가운데) <사진출처 크리스천 투데이>

내게 성탄절은 아버지 생신날이다. 그런데 마침 어제가 아버지 제삿날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생일에 돌아가셨냐는 뜻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육(肉)아버지’ 돌아가신 날이 ‘영(靈)아버지’ 오신 날이란 뜻이다. 그리고 진짜 아버지는 영아버지시다. 육아버지가 준 생명은 죽으면 썩는 육체생명이지만, 영아버지가 주신 생명은 죽지 않는 생명, 참 생명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아버지가 있으되 없었다. 무기수였던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징역살이를 시작해 26살 때 가석방되어 나오셨다. 20년 20일 만이었다. 아버지는 늘 교도소 접견실의 두꺼운 창 너머에 존재할 뿐, 손끝 하나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셨다. 주어진 면회시간 5분에 20년을 곱해봐야 내가 성장기에 아버지와 접한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똥개도 주인 믿고 짖는다는데 주인이 없는, 아버지가 없는 내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말해준다. 아버지 부재에서 비롯된 내 마음의 주소, 실존은 그랬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극단적으로 그런 의미다. 보호자 없는 아이, 보호자 없는 환자처럼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심리적 고아가 된다.

그랬던 내가 아버지를, 그것도 지존하신 아버지를,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늘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삼게 되었고, 어제는 그 아버지가 세상으로 들어오신 날이다. 왜냐하면 내가 하늘로 갈 수 없어서 아버지께서 땅으로 내려오셔야 했던 거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복음 1장23절)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함께 계시되 끝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장20절) 그러니까 나 죽을 때도 같이 계신다는 거다. 육적으로야 아무리 대단한 아버지라도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기 마련인데, 영아버지는, 하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는 나 죽을 때도 옆에 계신다고 했다. 그저 옆에 계실 뿐만 아니라 내 영을, 내 생명을, 진짜 나를 품에 안고 당신 계신 곳으로 데려가신다고 한다.

나는 이제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다. 교도소 접견실 뒤편의 두껍고 뿌옇게 때 낀 창너머에 실루엣으로만 존재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예 내 안에 들어와 계시는 아버지, 나와 동거하는 아버지가 계신다.

그 아버지가 태어나신 날이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나는 어제 많이 울었다. 아버지가 생긴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지금도 눈물이 난다.

나는 이제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다. 보호자가 있는 사람이다. 이제는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 똥개도 주인 믿고 제 집 마당에서 짖는다는데 누가 감히 내게!

내가 ‘예미녀(예수에 미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없었던 사람은 공감하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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