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수첩] “지금 머문 곳이 당신의 나라”라면?
순진한 이상주의자들이 꿈꾸는 한일관계 개선…비웃기엔 무거운 화두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일들을 최근 잇따라 체험했다. 세 가지 일이 모두 기삿거리가 될 만한 것이 못 된다 여기던 차에 문득 ‘왜 요즘 자꾸?’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결국 헝클어진 글씨의 취재수첩을 펼쳤다.
지난 6월25일 저녁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 3년간의 NHK 한국 지국장 생활을 마치고 일본 본사로 복귀하는 이토료지(伊藤良司) 선배 기자의 환송 만찬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주한일본대사를 만난 게 첫 일화다.
두 번째는 지난 6월28일 영화 <백자의 사람 : 조선의 흙이 되다> 언론배급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 참가한 일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전시병참기지로 벌거숭이 산하가 된 조선에 건너와 조선의 산림을 복원하고 이조백자 등 조선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하는데 생애를 바친 일본인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세 번째는 6월29일 오후 3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2012 한일국제 심포지엄>을 취재한 일이다. 한국의 상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일본의 <아시아평화연합>이라는 단체가 공동으로 개최한 행사였다.
25일 만난 무토 대사는 깍듯한 예의와 진정성이 묻어나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이 호감을 줬다. 만찬 중 등장한 마술사의 짓궂은 요청을 마다하지 않은 열정도 인상 깊었다. 하지만 기자는 솔직히 일본인들의 이런 진지한 근엄함, 깍듯한 매너를 신뢰하지 않는다. 지긋이 바라보는 그 눈과 닿은 뇌에서 어떤 비장한 계략이 가동되리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대다수의 한국인이 갖는 선입견이다.
28일 관람한 영화는 더 없이 뜨악했다. 영화 담당, 심지어 문화부 소속 기자를 단 한 번도 안 해본 기자를 시사회에 초청한 영화사의 저의가 의심스러웠으니까. 내용에서 “한일관계는 좋아져야 한다”는 식의 작위성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당연히 ‘그렇게 호락호락하게?’라는 식의 치기가 발동했다. 일본 정부가 타카하시 반메이(高橋伴明) 감독에게 제작비를 지원했을 것이라는 선입견도 차츰 굳어졌다.
29일 한일국제심포지엄 역시 여러모로 낯설었다. 주최 측의 연설을 들어보니 이 분들의 역사의식은 기본단위가 2400년쯤 되는 상고사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온 만큼 한일양국은 민족과 국가, 인종과 구원을 딛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현하자”는 게 이날 행사의 키워드였다. 좋은 얘기이긴 한데 ‘한일관계 호전을 바라는 친일세력들 아닌가’라는 선입견은 어쩔 수 없었다.
최근 3가지 ‘일화’에서 느낀 3가지 ‘선입견’은 일본과 일본인의 진정성을 ‘이해(sympathy)’, 심지어 ‘공감(empathy)’하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선입견’은 제국주의자 일본의 침탈을 받았던 식민지 백성의 정신적 외상(트라우마) 탓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몇 가지 사실은 진정성을 매개로 새로운 ‘진실’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25일 행사의 주인공인 이토료지(伊藤良司) 기자는 “17년 전 고베 지진 당시 한국 초등학생들에게 대지진에 대한 느낌을 물으니 일부 학생들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데 대한 천재(天災)’라고 얘기해 충격을 받았었는데, 2011년 대지진 때는 한국 정부가 가장 먼저 일본에 구조대도 보내고 전국 규모의 모금활동도 있었다”고 말했다. 또 “한일관계에 대해서 ‘일진일퇴’라고도 하지만 10번 전진하면 9번 후퇴하더라도 1보는 확실하게 전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98년 전인 1914년 조선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 임업시험장에 부임, 조선을 점령한 다수 일본인들에게 손가락질과 뭇매를 당하면서도 조선인과의 공감을 이뤘던 아사카와 타쿠미(淺川巧)는 생전의 뜻대로 지금 서울 망우동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다.
그를 기린 영화를 만든 감독은 ‘인터내셔널(International)가(歌)’가 등장하는 일본 적군파 영화(2001년 개봉)를 만든 사람이다. 오는 12일 한국에서 개봉하는 영화 <백자의 사람>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그것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대사가 나온다.
29일 한일국제심포지엄에서 한 주제발표자는 “무슨 주의, 사상, 종교에서 벗어나야 하며, 세계의 공통적인 역사관을 지금의 속지주의(屬地主義)에서 속인주의(屬人主義)로 바꾸지 않으면 한일관계를 포함한 지구촌의 국가간 분쟁은 계속된다”고 주장했다.
3곳에서 만난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의 바람처럼 한일관계는 쉽게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국가의 탄생 자체가 지구촌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보다는 나누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과 국가에서 지배자 노릇을 하려는 자들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고 대립해야 자신의 통치권을 추인 받을 수 있다. 각각의 국가에 속한 많은 국민들은 그런 지배자들의 통치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지배자들의 속성이 지구촌의 평화롭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협하는 현실 세계의 불가피한 ‘어둠’이라면, 그 ‘어둠’을 깨는 ‘빛’ 또한 항상 존재한다. ‘빛’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어둠’을 부정하거나 적대시 하지 말고 ‘빛’으로 채우라고 촉구한다.
세계신문명운동연합 강병천 총재는 “어둠과 밝음은 서로 다른 두 갈래 길이 아니다. 어둠은 밝음의 반대편이 아니라 빛의 모자람과 부재일 따름이다”라고 자신의 저서에 썼다. ‘어둠’속에서 가짜 공익을 주창하는 지배자들의 터전에 ‘빛’을 쐬자는 주장은 또 다른 종교적 신념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성을 떠나, 이런 주장만큼 ‘반(反)평화를 무릅쓴 국가주의자’들에게 위협적인 게 또 있을까.
한국정부가 29일 오후 3시께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서명 연기 사실을 일본 정부에 통보했다고 한다. 협정의 내용, 절차적 잘못 여부, 외교적 태도의 적절성, 향후 한일관계에 미치는 영향 등의 이슈가 당분간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를 장식할 것이다.
양국의 지배집단은 각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이번 이슈를 적절히 활용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 과실을 향유할 것이다. 이슈를 선점해 이득을 얻은 자들은 자신들의 높은 지략과 순발력이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울 것인가.
그러나 이런 뛰어난 지략을 갖춘 자들이 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들도 의외로 많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선 사람간의 연대에 주목하고, 평화가 아닌 대립과 긴장의 반사이득으로 연명하는 극단적 국가주의자들을 외려 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들 중 누가 언제쯤 이길 지 여부는 짐작키 어렵지만, 누가 궁극적인 공감을 이끌어 낼 지는 금세 뚜렷해진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