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에서 통큰 기업가로”···제주 여걸 김만덕기념관 7주년
김만덕기념관 개관 7주년 기념식이 27일 오후 3시 제주 소재 김만덕기념관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에선 ‘이기조 달항아리-제주를 담다, 닮다’ 초대전도 함께 열린다.
김만덕(1739~1812)은 제주도 출신으로 형조판서를 지낸 이가환은 시를 지어 헌정하였고 영의정 채제공은 <만덕전>이라는 전기를 써서 바쳤다.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고해 김만덕의 삶을 살펴본다.
김만덕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 12살에 부모님이 모두 사망하여 기생의 몸종으로 의탁하였고, 다시 기생의 수양딸이 되어 가무를 익혀 제주도에서 한때 가장 유명한 기생으로 살았다. 가난한 집안 출신에다 전직 기생이었던 독신녀를, 여성에게 엄중했던 유학을 익힌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칭송하며 전국적인 화제의 인물이 됐다. 이는 김만덕이 객주를 운영하면서 제주도 물품과 육지 물품을 교역하는 유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루었고, 그 부를 계속되는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도민을 살려내는데 쾌척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정조시대 제주도민들이 계속되는 재해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가 풍랑에 침몰하는 불상사까지 겹쳐 아사의 위기에 처하자, 만덕은 유통업으로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을 구입하여 제주민들을 살려내었다. 당시 만덕의 인기는 남성들만 활개치는 세상에서 여자가 홀로 많은 재산을 형성하는 비상한 재주를 가졌던 것과, 어떤 남성보다 많은 양의 곡식(쌀 500섬)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쾌척한 것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다.
뛰어난 기업가이자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자선사업가로도 오늘 우리가 충분히 김만덕을 기릴만하다. 그러나 김만덕을 오늘날 다시 생각하는 것은 엄중한 유교 규범이 여성을 옥죄고 있던 시기에 시대와 불화하지 않고 당시 여성에게 지워진 한계를 거침없이 뛰어 넘었던 용기를 김만덕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고 기생으로 성공했으나 가족의 명성을 더럽힌다는 질책 때문에 기적(妓籍)에서 빠져 나왔고, 가족을 원망하지 않고 기근에 처한 가족을 구함으로써 가족과 화해하였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녀로 유교 사회에서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당시 활발해진 해상을 이용한 유통업에 눈을 떠 여성기업인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던 창의적인 개척자였다.
김만덕은 자신이 쌓은 부를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임금(정조)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고, 명예직이었으나 ‘의녀반수’라는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에 이르러 주변부에서부터 중심부로 우뚝 서게 되었다. 특히 정조가 그의 업적을 치하하기 위해 소원을 물었을 때 김만덕은 주저 없이 금강산 구경이라고 대답하였다. 당시 여성은 육지에 갈 수 없다는 법을 무시하면서, 집안에 갇혀야 했던 여성의 테두리를 단숨에 뛰어넘으면서 여성에게는 부인되었던 이동의 자유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또한 금강산 구경은 당시 보통 여성으로서는 꿈꿀 수조차 없었던 성공한 남성의 영역에 도전한 것이었다. 정조는 김만덕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었고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그리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관공서가 김만덕에게 편의를 제공하도록 지시하였다. 김만덕이 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여성으로서 놀라운 일을 행하였고 또 금강산 가는 길에 몸소 보여주고 새로운 것을 개척해나가는 용기 있는 여성 김만덕을 칭송하였다.
채제공이 쓴 <만덕전>에 보면, 김만덕이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한양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출발에 임하여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목이 메어 말하기를 ‘이승에서는 다시 상공의 얼굴 모습을 볼 수가 없겠습니다’하고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상국이 말하기를 ‘…이제 작별함에 있어서 도리어 어린 여아처럼 척척거리는 태도가 무엇이냐’고 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추측하건대, 김만덕은 당시 나이 58세에 78세였던 채제공을 사모하여 이별을 앞두고 슬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김만덕은 기생이었을 때는 수많은 남성들의 유혹을 뿌리쳤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나, 자신을 감정을 억제하고 수절하는 조선조의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또 욕망을 드러내고 추구하는 개방적인 아름다운 여성이기도 하였다.
김만덕은 억척스러운 제주도 여성의 전형인 신화 속의 ‘가믄장아기’와 같이 시대를 뛰어넘으나 시대와 불화하지 않으면서도, 당차고 창의적이며 강한 의지력과 탁월한 능력으로 여성에게 부과된 경계를 뛰어넘었고, ‘자청비’처럼 자신의 사랑과 감정에 충실했던 여성이었다. 김만덕은 가믄장아기와 자청비가 혼합된 아름다운 여성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있다. 김만덕은 전통적으로 여성성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타인에 대한 보살핌과 나눔의 미덕과, 남성성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시대를 꿰뚫어 보는 이지적 능력, 개척 정신과 강한 의지력을 함께 가진 양성적 인간으로 여성주의를 신봉하는 현대 여성에게 삶의 사표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이가환이 김만덕에게 헌정한 시에서 ‘돌아오니 찬양하는 소리가 따옥새 떠나갈 듯하고/ 높은 기풍은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지’라고 썼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만덕의 명성은 당시 드높았고 세상의 귀감으로 오래 기억될 것으로 예견했다. 또한 고려 때 스님 혜일과 어승마 노정과 함께 제주에서 태어난 세 가지 특이한 존재로 탐라 삼기로 기록되고 있다. 김만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주도는 김만덕 축제를 해마다 열고 있고, 김만덕기념사업회에서는 ‘나눔 쌀 천 섬 쌓기, 만 섬 쌓기 행사’ 등의 행사를 벌이고 있다. <출처 함께가는 여성, 2004년 7/8월호, 한국여성민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