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쪽 ‘대처 회고록’을 1/10로 요약하며 얻은 것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필자는 1994년께 김덕 부장 당시에 안기부에 잠시 근무했다. 김 부장은 북한 핵문제에 대한 나의 요약글을 보더니 국방부에 크게 어려움이 없으면 도와달라고 했다. 특별히 시키는 일도 없었는데, 어느 날 대처 회고록을 요약해달라고 했다.
전권을 철저히 정독하고 나름대로 700페이지를 72페이지로 요약했다. 집권 당시의 상황과 과제로부터 노조 대처, 포클랜드전쟁, 북아일랜드, 노조 개혁, 대미 문제, 대소 전략, 걸프전쟁, 퇴진에 이르기까지 각 절을 상세히 분석하고 에피소드와 연설 명구까지 찾아 올렸다.
그 가운데 명구의 예를 들어본다.
“Diplomacy without arms is music without instrument.”
“There is more to foreign policy than diplomacy.”
“The most important requirement in my campaign is to have one clear message.”
“For me at that moment, each sentence was my testimony at the bar of history.”
“You may chain a man-but you cannot chain his mind.”
“You may enslave him-but you will not conquer his spirit.”
정치는 말로 이루어진다. 대처의 연설은 참으로 감동이었다. 수상은 동시에 총사령관이었다. 처칠이 그러했다. 영국 사람은 요구를 받으면 1분 이내에 준비하여 누구에게나, 어떤 주제로나 연설할 수 있어야 한다. 영국 신사의 목표다.
런던에 4년 있으면서도 잘 몰랐던 영국과 영국정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대처 수상을 하루에 세번 BBC를 통해 배우며 영어를 익혔다.
나의 부장에 대한 보고는 단순히 요약이 아니라 사실상 대처 회고록의 ‘재구성’이었다. 김덕 부장은 내가 요약본을 가져가면 놓고 가라고 했다. 당시는 통신이 삐삐(p/b)로 통했는데 나는 보통 차고 다니지 않았다. 일요일에 인천 처가에 갔더니 국가 안전기획부장이 찾는다고 난리가 나 있었다. 의사 집안이라 놀란 것이다. 서둘러 안기부에 복귀했으나 별일이 없었다.
권영해 국방장관이 안기부장으로 왔다. 각 부서에서 몇 명을 뽑아 세계여행을 하고 오라며 특히 이스라엘과 서독, 싱가포르를 지적했다. 중동여행 첫 출발은 예루살렘이었다. ‘통곡의 벽’에서 전통 복장의 유태인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2천년 유대인의 역사를 절감했다.
중동전쟁의 현장을 방문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갈릴리호수는 생명선이었다. 저수량을 센티미터 단위로 측정하고 있었는데 50만톤이라고 했다. 여기에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목을 메고 있었다. 춘천호가 29억톤이다.
독일로 날아갔다. 통일되기 이전이었다. 유럽에서는 고르바초프 이래 냉전이 풀리고 있던 때라 동서독 냉전은 남북한 갈등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이스라엘에서 독일로 가는 길은 이란, 즉 과거의 페르시아를 날아갔다. 대부분이 황량한 불모지였다.
중동을 무대로 한 영화는 많다. 중동전쟁에 대해서도 김희상 장군의 책 <중동전쟁>에서 읽었다. 아프간 전쟁도 영국이 19세기에 겪었던 고난으로 많이 들었다. 소련이 아프간에서 겪었던 고난과 미국이 아프간에서 겪었던 낭패로 예상하던 바였다. 중동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경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전쟁을 소련이 공세를 시작한 것으로 바로 알아챈 지도자가 트루먼이다. ‘죽의 장막’에 가려 있던 중공을 문명세계로 받아들이되, 잘못 받아들인 것이 닉슨과 키신저다. 레이건과 대처는 절호의 배합을 이루어 소련을 멸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