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지나면서 깨닫는 ‘훌륭하게 죽는 법’
산 너머 저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원불교의 일원상 서원 문을 보면 “능이성 유상(能以成 有常)하고, 능이성 무상(無常)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불멸(常住不滅)로 여여자연(如如自然)하여 무량세계(無量世界)를 전개하였고…”라고 되어 있다.
이제 저 산 너머로 넘어갈 날이 머지않은 필자로서는 평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우주의 진리가 본래 무량세계로 펼쳐져 있으니 저 세계도 아마 이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이생에 사는 모습이 저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이 세상 최후의 일념이 내생 최초의 일념이 되는 것이다. 그럼 이 세상의 마지막도 성스러운 삶으로 일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 생각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저항으로 현대 의술에 의존해 단지 몇 시간만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려고 발버둥 친다.
만물은 변하고 그리고 죽는다. 변하고 죽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진리다. 우리가 반드시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나를 사로잡고 내가 집착하는 이 세상 모든 행위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송(宋)나라의 주신중(朱新中, 1097~1167)은 훌륭한 죽음으로 ‘오멸’(五滅)의 실천을 내세웠다.
첫째, 멸재(滅財). 재물과 헤어지는 일이다. 살아서 마련한 재산에 미련을 두고서는 편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둘째, 멸원(滅怨). 남과 맺은 원한을 없애는 일이다. 살아서 겪었던 남과의 불미스러운 관계를 씻어내야 마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
셋째, 멸채(滅債). 남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다. 빚이란 꼭 돈을 꾸어 쓴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도 빚이다.
넷째, 멸정(滅情). 정든 사람, 정든 물건과의 작별하는 일이다. 아무리 정 들어도 함께 갈 수가 없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라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다섯째, 멸망(滅亡).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신념이 멸망(滅亡)이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계획이다. 즉 사람은 죽음 이후에 대하여 분명하고 바른 계획이 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 생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생의 가치를 발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죽을 때에 사의 도를 알지 못하면 악도를 면하기 어렵다. 세상에서는 살아 있는 세상을 이승이라 하고 죽어 가는 세상을 저승이라 한다. 그래서 이승과 저승을 다른 세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몸과 위치를 바꿀 따름이요 다른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원불교의 소태산(少太山) 부처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평생에 비록 많은 전곡을 벌어 놓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나니,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어찌 영원한 내 것이라 하리요. 영원히 나의 소유를 만들기로 하면, 생전에 어느 방면으로든지 남을 위하여 노력과 보시를 많이 하되 상(相)에 주함이 없는 보시로써 무루(無漏)의 복덕을 쌓아야 할 것이요, 참으로 영원한 나의 소유는 정법(正法)에 대한 서원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이니, 서원과 마음공부에 끊임없는 공을 쌓아야 한없는 세상에 혜복(慧福)의 주인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