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새벽 단독처리 ‘흑역사’···삼선개헌안·노동법개정안 등

1996년 성탄절 밤 신한국당(현 야당의 전신 격)의 노동법 날치기 처리와 이에 따른 노동계 총파업을 보도한 한겨레신문.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초부터 급속도로 김영삼 정부는 레임덕을 초래하고, 아들 현철씨가 구속되는 비극을 맞는다.

1969년 삼선개헌안 박정희 장기집권욕으로 3년후 유신헌법 
1996년 노동법개정안 문민정부 몰락 재촉, 아들 김현철 구속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1969년 9월 13일은 “대통령을 세 번 연임할 수 있다”는 내용의 헌법안이 표결에 부쳐지는 날이었다.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 단상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자정을 넘기면서 야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직후 14일 새벽 2시, 여당인 공화당 의원들이 국회 제3별관에 모였다.

3선개헌안은 이효상 국회의장 사회로 찬성 122, 반대 0으로 통과되었다. 날치기였다. 국회의장은 의사봉이 없어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세 번 두드렸다. 코미디 같은,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삼선개헌안 전격통과 당시 언론보도

3선 개헌안은 그해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져 투표율 77.1%, 찬성률 65.1%로 통과됐다.

개헌 전 헌법에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해서 중임(重任)할 수 있었다. 두번째 연임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상 다시 출마할 수 없게 되자 3선개헌 군불을 지피며 새벽 날치기 통과를 지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1996년 성탄절 이튿날 새벽 노동법 날치기

1996년 12월 26일 새벽, 야당의원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여당인 신한국당 의원들이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찬양고무죄, 불고지죄 수사권 등의 항목을 부활시킨 안기부법 개정안도 강행처리했다.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던 거대여당이라서 가능하기도 했지만 민의를 무시한 채 강제로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1996년 2월 이른바 김영삼 문민정부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로 인해 지지율이 점차 하락하자 회심의 카드로 노동법 개정을 시도하기로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동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이라는 정부 발표로 많은 기대가 있었다. 처음 발표된 개정안은 복수노조 금지조항 폐지와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의 철회,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 3권 허용법안 등 고쳐진 사항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社)측에서 제안한 사안들을 정부가 검토 없이 수용한 점이 노동자들의 반발을 샀다. 이에 신한국당은 정부안을 수정하여 12월 17일에 다시 발표했다. 하지만 수정 법안은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와 정리해고 사유를 구체화하여 사측에서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만드는 등 기존안보다 후퇴하고 있었다.

신한국당은 1996년 12월 26일 오전 6시, 여당 의원 154명은 국회 본회의장으로 버스로 이동하여 노동법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에 민주노총은 당일 모든 사업장에 총파업을, 한국노총은 다음 날 27일 총파업을 선언했다. 야 3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은 즉각 ‘반독재투쟁공동위원회’를 설립한 후 영수회담 요구와 헌법재판소에 노동법 날치기 무효 헌법소원을 제출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국회의원의 권한을 침해했지만 가결 선포 행위 자체는 무효가 아니라며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게다가 1997년 1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도대체 선진국 어느 나라에 노동쟁의가 있느냐?”고 했다.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정국은 폭발하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전국단위 총파업을 벌였다. 넥타이 부대, 시민과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1987년 6월 항쟁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1월 21일 김대중, 김종필씨 등 여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가진 후 노동법 재논의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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