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8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창립

2007년 미-이란 공식 회담

2007년 5월28일 오전 10시30분께(현지시각) 이라크 주재 라이언 크로커 미 대사와 하산 카제미 이란 대사가 이라크 바그다드의 미군 특별 경계구역인 ‘그린존’내 총리공관에서 만나 이라크 폭력사태 해결을 논의했다.

1980년 단교 이래 외교무대에서 공식 접촉이 없었던 이란과 미국이 27년 만에 회담 테이블에 마주 앉은 것이었다. 이란 핵문제와 자국민 억류사건 등 다른 의제는 논의하지 않았다.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는 회담에 앞서 양측 대사에게 “이라크는 외국 군대나 간섭 없는 안정된 나라가 되길 바란다”며 “이라크가 테러세력의 기지가 되지 말아야 하며 이라크 주둔 미군은 이라크 군경 재건을 도와줄 뿐이지 이웃나라를 공격하는 전초기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라크에선 국가안보자문 모와파크 알-루바이에가 대표로 참석했다. 이날 회담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이란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어기고 핵 활동을 지속했고 양국이 상대 국민을 장기간 억류하는 상황이어서 극적인 외교적 해법을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꼭 5년 뒤 이란과 ‘P5+1(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등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은 지난 5월23일부터 이틀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이란과 핵협상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양측은 6월18~1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재협상에 나서기로 했다.


1998년 파키스탄 5차례 지하 핵실험

1998년 5월28일 파키스탄은 인도에 맞서 4번의 핵실험을 진행했다. 이틀 뒤인 같은 달 30일에도 1번 추가적인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날 다섯 번의 핵실험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파키스탄 원자력위원회는 이날 핵실험이 최대 TNT 40KT 상당의 파괴력을 발생시켜 리히터 규모 5.0의 지진 신호를 생성했다고 보고했다.

파키스탄의 이날 핵실험은 인도가 같은 달 11일 24년 만에 감행한 3차례의 지하 핵실험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인도는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5월13일 다시 2차례의 핵실험을 더 강행했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핵실험이 자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면서 핵실험으로 맞섰던 것이다.

핵실험금지조약(CTBT)에 가입하지 않은 두 나라가 벌인 핵실험 공방으로 세계는 핵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세계 여러 나라가 비난 성명을 내고 미국과 일본이 경제 제재의 발동을 발표했다. 그제서야 두 나라 사이의 핵실험 경쟁은 다소 누그러졌다.


1964년 PLO 창설

1964년 5월28일 범 아랍계의 연합에도 불구하고 정규전에서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200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게릴라 조직을 정비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창설했다.

16년 전인 1948년 5월 유대인들이 2000년간 국토 없이 유랑하다가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팔레스타인 거주자들의 땅을 빼앗자 그 땅에서 쫓겨 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대 이스라엘 무장투쟁을 전개해왔고, 그 조직적 구심인 PLO가 창설한 것이었다.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가 PLO 새 의장으로 선출됐다. 그 뒤 PLO는 1970년대에 각종 비행기 납치와 서방국가들에 대해 무차별 테러를 자행했다. 하지만 1988년 독립 국가를 선포 하면서 대통령으로 추대된 아라파트는 내부 강경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중동 평화협상에 참여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가자, 예리코시의 자치협정안에 서명했다.

1901년 이재수의 난 발생

1901년 5월28일 제주도민들은 천주교도들과 관군이 지키고 있던 제주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천주교도 300명(일부 기록에는 700명)이 도민들에 의해 잔인하게 죽었다.

조선 말 개항기 천주교는 정부의 묵인 하에 ‘박해시대’를 마감하고 신앙의 꽃을 피운다. 1886년 체결된 조·불 수호통상조약은 ‘묵인’을 ‘공인’으로 격상시켰고, 그예 천주교는 양지 로 올라서게 된다.

대신 토착민들과 충돌이 잦았다. 1895년부터 10여년 간 전국에서 300여건의 교안(敎案·종교적 충돌)이 일어날 정도였다. 토착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몰이해와 공격적인 선교 방식, 천주교인을 이용한 세금징수관의 과중한 세금부과, 제주도민의 반감을 천주교 측으로 돌리려 한 일본인 수산업자의 농간 등 경제적ㆍ문화적 요인들이 중층으로 작용했다. 천주교가 특권세력으로 비치다 보니 그에 편승해 이권을 챙기려는 일부 신도들의 과도한 행동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도민들은 천주교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1901년 신축(辛丑)년에 일어난 ‘이재수의 난’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이재수를 앞세운 도민들이 제주성을 공격해 들어가자 천주교인들은 제주성을 폐쇄하며 맞섰지만 결국 5월28일 제주성은 함락됐다. 프랑스 함대까지 동원됐지만 봉기는 이미 진압된 뒤였다.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천주교측은 이 사건을 ‘신축교난’ 혹은 ‘신축교안’이라 부르고, 주민들은 ‘이재수의 난’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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