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1일] 인도네시아 독재자 수하르토 하야
2008년 장나라씨 쓰촨성에 학교 추진
2008년 5월21일 한국의 연예인 장나라씨가 지진 피해로 고통받는 중국 쓰촨성에 소학교(초등학교)를 세우기 위해 기부와 함게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먼저 장나라씨 팬클럽은 지진피해복구를 위해 10만 위안(약 1500만원)을 중화자선총회에 기부했다. 장씨의 아버지인 연극배우 주호성씨는 이날부터 기금을 모아 쓰촨성에 ‘나라희망학교’(가칭)를 세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시 4500만원쯤을 모금할 것으로 계획됐고, 모금액은 실제로 학교를 짓는데 적잖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는 2009년 1월 하순 이 지역에 80억 원 상당의 의류를 지원하기도 했다. 장씨는 같은 해 5월10일 쓰촨성지진 추모 1주기를 맞아 레이구 소학교의 새교정을 찾았다. 이날 10일 13시에 장나라와 제남시 공산당 서기(장관급)와 치루완보의 총편집장, 제남시 자선 총회 회장, 레이구 소학교 교장, 베이추안현 현장과 미엔양시 시장 및 전체 학생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소학교 건물의 준공식이 열렸다. 장나라 음악 교실의 설립 행사도 함게 열렸다. 이튿날에는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 주석이 이 학교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사임
1998년 5월21일 오전 9시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7번의 재선을 통해 32년 동안 철권통치를 휘두른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짤막한 사임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오전 9시에 시작된 사임성명에서 77세의 독재자는 오랫동안 2억 국민 위에 군림한 ‘전제군주’의 그것이 아닌 떨리는 목소리로 “나한테 어떠한 실수들과 부족한 점 및 실패들이 있었다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라면서 국민에게 용서를 빌었다. 사임 성명은 국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어로 이뤄졌다.
전국적인 민주화요구에 밀려 물러나게 된 것이다. 당시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농성중이던 대학생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수하르토 대통령의 하야를 환영했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같은 해 2월부터 수하르토가 하야하기까지 석달 동안 인도네시아 국민 500여 명이 숨지고 3000여 명이 다쳤다.
수하르토는 재임기간에 군의 힘으로 국내 질서를 유지하고 일본, 미국 등 선진국과 협조해 경제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재계 전면에 가족을 내세워 권력을 남용하고 우리 돈으로 50조 원에 이르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수하르토의 사임후 B J 하비비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91년 인도 총리 라지브 간디(Gandhi, Rajiv) 암살
1991년 5월21일 인도의 총리 라지브 간디가 유세 도중 남부 타밀나두 주에서 폭탄 테러를 당해 사망했다. 경찰은 스리랑카에서 독립투쟁을 벌이는 타밀 게릴라 단체가 암살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라지브는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외동딸인 인디라 간디의 아들로 그의 어머니 역시 시크 교도에 의해 암살됐다.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후 40여 년간 인도를 통치해온 네루 일가는 가족중 3명을 비명횡사로 잃었다.
라지브는 1981년부터 인디라파(派) 국민회의당의 총서기를 지내다가 1984년부터 총리로 재직했다. 라지브는 다른 당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성급한 결론을 삼가는 온화한 인품을 가진 정치가로 알려졌다.
암살사건으로 정치적 혼란상태에 빠져들었고, 경제적으로도 파산직전까지 몰려 국정의 방향타를 잃고 혼란을 거듭했다. 인도 국민의회당은 라지브가 죽은 뒤 미망인 소니아 간디는 국민회의당으로부터 당수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1964년 한국 특전사 군인들이 판사 협박
1964년 오전 4시30분 한국 서울 서소문 법원 청사에 군용 구급차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공수단 1특전공수단 소속 최문영 대령이 지휘하는 장병 8명과 공수단 출신 민간인 2명이 카빈총 등 완전무장을 하고 법원에 난입한 것이다.
하루 전 있었던 민주화 시위로 입건된 사람들의 구속영장을 일부 기각했던 양헌 판사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숙직자들로부터 양헌 판사의 집을 알아낸 공수부대원들은 차를 돌려 동소문동에 있던 양헌 판사 집으로 향했다.
양헌 판사는 하루 전인 5월20일 낮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한일 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회 주최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에 참가한 주모 학생들에 대해 대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같은 해 6월6일 새벽에는 최대령 등 1공수특전단 소속장교 8명이 술을 마신 후 순찰 도중에 동아일보사에 침입, 숙직중인 김광희 기자에게 법원난입 사건으로 구속당한 황길수 대위 등에 대해 인신공격성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약 45분간 폭언을 하는 등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7월10일 제6군관구 계엄보통군법회의는 법원 및 동아일보사 난입사건의 판결공판을 열고 주모자 최문영 피고인에게 징역 5년, 관련자 4명에게는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장교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 하사관 등 13명은 무죄를 선고했다.
역사가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 집권 때 한국에는 3권 분립이 매우 미흡했고, 따라서 군인 출신 박 대통령이 공공연하게 사법부를 수하 공무원 취급하는 일이 잦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1975년 공산 라오스군 내전 종식 자축
1975년 5월21일 라오스의 중남부 도시 사반나케트에 공산 ‘라오스 애국전선’ 대원들이 입성, 내전 종식을 자축했다. 1963년부터 우파와 내전을 시작한 라오스 애국전선은 1975년 5월 내전에서 승리해 라오스의 완전한 공산화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 ‘라오스 애국전선’은 마침내 같은 해 12월 국왕을 폐위시키고 라오스인민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