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8일]아웅산 테러현장 30년만에 찾은 한국대통령
2009년 러시아, 세계 최초 해상원전 착공
2009년 5월18일 러시아가 세계 최초의 해상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착수했다. 러시아 원자력발전소 관리 국영기업인 로스아톰의 세르게이 키리엔코 사장은 이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대통령에게 해상 원전 사업을 보고했다. 계획된 7개 해상 원전 중 첫 번째 원전 건설에 들어갔다는 보고였다. 러시아는 애초 2007년 공사에 착수, 2010년 가동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1개 해상 원전은 길이 144m, 폭 30m의 부유 시설에 2기의 원자로를 탑재하는 구조로 건설돼 이동이 가능하다. 현재 부유 구조물 조립이 한창인 것으로 알려졌다.
출력은 70㎿이며 내구 연수는 40년이다. 총 사업비는 30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회사 측은 보고 있다.
이 해상 원전은 극동 캄차카 반도 오지 지역 전력 공급에 이용될 예정이다. 몇몇 환경단체들은 “원전의 침몰 위험성이 있어 위험한 계획”이라고 비판했다.
2008년 ‘아웅산 테러범’ 유일 생존자 사망
2008년 5월18일 ‘아웅산 테러사건’을 저지른 북한 공작원 강민철(당시 53세)이 숨졌다.
익명을 부탁한 버마 교도소 수감당국 관계자는 AP통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버마 감옥에 수감된 외국인 최장 수형자였으며, 사망 전 간질환을 앓고 있었던 강민철이 버마 인세인 교도소에서 25년간 수감 중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강씨는 지난 1983년 버마 아웅산 국립묘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일행을 겨냥해 폭탄 테러를 일으킨 3명의 공작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강씨 등의 테러로 당시 대통령을 수행하던 각료 등 2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따라 버마는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하지만 이 당시 북한이 버마 군을 지원하면서 양국간 관계 개선이 이뤄졌다. 두 나라는 2007년 4월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미얀마와 동남아 일대 뉴스를 전문으로 다루는 <이라와디>는 “그는 지금 남북한 어디에도 가기 싫어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지난 2012년 5월15일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버마를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이 테러사고 이후 버마를 방문한 것은 30년 만의 일이었다. <이라와디>는 이날 보도에서 “한국 대통령으로서 30년 만에 처음 버마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버마 정부는 보안태세를 강화했다”면서 “이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거의 죽을 뻔했던 아웅산 국립묘지에 가서 아웅 산 수지의 부친인 버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묘역에 참배했다”고 보도했다.
전두환 당시 한국 대통령이 아웅산 국립묘지 테러사건 때 목숨을 건진 것은 전 전 대통령의 숙소에서 행사장까지 안내할 버마 외무장관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1999년 에후드 바라크 새 이스라엘 총리
1999년 5월18일 이스라엘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가 새 총리로 당선됐다. 하루 전인 5월 17일 총선에서 44%의 득표에 그친 베냐민 네타냐후 전 총리를 56% 득표율로 누르고 새 총리에 당선됐다.
이스라엘 군참모총장 출신인 바라크 신임 총리에게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군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매와 같은 비둘기”로도 불렸다. 뛰어난 전략적 능력뿐만 아니라 동안(童顔)에 땅딸막하고 배가 불뚝하게 나온 외모 때문에 “이스라엘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미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체계분석) 석사학위를 받았다. 군에서 탁월한 능력을인정 받은 그는 1972년엔 특공대를 이끌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 의해 납치된 벨기에 항공기 인질 구출작전에 나서 수백 명을 구하기도 했다.
특히 1973년에는 여장을 한 채 특공대를 이끌고 베이루트에 침투, 뮌헨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단을 학살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9월단’ 요원 3명을 암살했다. 이작전은 이스라엘에서 전설이 됐다.
이츠하크 라빈 전 총리가 그를 정계에 입문시켰다. 1995년 내무장관을 지냈고, 라빈이 피살된 뒤 시몬 페레스 정권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다. 1997년 노동당 당수로 선출됐고 2년 만에 총리가 됐다.
1997년 신임 나차긴 바가반디 몽골 대통령
1997년 5월18일 몽골의 제 2대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 공산당 후신인 인민혁명당(MPRP)의 나차긴 바가반디 후보가 당선됐다. 60.79%의 높은 득표율로 당시 대통령인 푼살마긴 오치르바트 민주연합 후보를 누르고 당선, 몽골 국민들은 ‘급진 개혁’ 대신 ‘안정과 점진개혁’을 선택했다. 바가반디 후보는 승리가 확정된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장경제 개혁의 속도를 늦추겠다”면서 점진개혁론을 밝힌 뒤 “대통령 권한도 축소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1950년 몽골서부 자반지역에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바가반디는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구 소련 레닌그라드의 대학에 4년 간 유학했다. 유학을 마치고 1972년 몽골로 돌아온 그는 울란바토르의 맥주주정공장에서 4년간 일해 학비를 모은 뒤 또다시 구 소련으로 건너가 식품공학을 전공했다. 그 뒤 모스크바 사회과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 인민혁명당에 입당, 정치에 입문했다. 바가반디는 1990년 당중앙위원회 서기로 등용됐고 1992년 구 소련 붕괴 후 처음으로 열린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6년 6월까지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1997년 2월 당 대회에서 당수로 선출됐다.
1974년 인도 첫 핵실험 성공
1974년 5월18일 오전 8시분, 인도가 서부 라자스탄주의 타르사막에서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지하 100m에서 행해진 이번 핵실험에서 핵폭발 장치와 원료 플루토늄 등은 모두 인도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이번 핵실험 성공으로 인도는 미국과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의 핵보유국이 됐다. 인도정부는 이 실험이 평화이용연구의 일환으로 광산이나 토사이동 등을 위해 계획된 것이며 핵병기보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날의 핵실험은 자국 내에서는 환영받았지만 국외로부터는 핵확산의 위협을 고조시켰다고 판단, 일제히 반발의 목소리가 높았다. 특히 1956년 이래 인도에 원자력기술을 원조해온 캐나다는 나흘 뒤인 같은 달 22일 원조를 전면 중지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등으로오랜 기간 대치해온 파키스탄은 20여일 뒤인 6월10일로 예정됐던 인도-파키스탄 실무협의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