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일본 유학생은 누구?

구한말 미국 방문 중에 찍은 사진. 유길준 민영익 홍영식 등이 보인다.

[아시아엔=이강렬 미래교육연구소 소장]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9년 현재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은 1만 7012명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으로 일본에 처음 유학을 한 사람은 누구이고 언제 유학을 떠났을까?

139년전인 1881년 고종 황제의 조선 조정은 최초로 조선인 4명을 일본에 국비 유학생으로 파견을 한다. 대표적인 인물을 보면 유길준, 윤치호, 김양한, 유정수 등이다. 이 가운데 유길준, 윤치호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됐을까? 이야기는 조금 복잡하다. 그 단초는 18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과 일본은 이 해에 병자수호조약, 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한다. 이에 앞서 일본은 1875년 9월 21일(고종 12년, 음력 8월 22일) 군함 운양호를 강화도 앞 바다에 측량을 구실로 파견해 조선군의 발포를 유도했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1876년 2월 조선을 협박해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한다.

조선은 이를 계기로 1876년 4월 김기수, 김굉집을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파견한다. 이는 양국이 과거 관계를 청산하고 근대적 입장에서 외교 사절을 파견한다는 의미다. 과거 조선은 일본에 ‘조선통신사’란 이름으로 외교사절을 파견했다.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기수는 2개월간 일본 전역을 돌아보고, 조선으로 귀국을 해서 “조선이 일본의 문물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고종에게 건의한다. 일본은 이미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 국가로 탈바꿈을 한 상태였다.

고종 황제는 개화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1881년 4월 일본의 신문물을 둘러보고 오라고 신사유람단을 파견한다. 이때 박정양, 홍영식 등 12명의 중견관료와 유학생을 포함한 수행원 27명, 일본인 통역관 12명, 하인 13명 등 총 64명으로 신사유람단을 꾸민다.

여기 신사유람단에 포함된 유학생들은 유길준, 윤치호, 김양한, 유정수, 박명화, 임태경, 이원순, 김재우, 박인순 등이다. 일본측 외교문서에 따르면 조선사절단 대표인 김홍집과 이조연은 일본의 이시하타 사다와 가진 회담에서 “윤치호 등 유학생들이 어학(일본어)을 배울 수 있도록 일본에 머물 경우 선처해 달라”고 당부한다.

당시 26세였던 유길준과 25세의 유정수는 게이오 의숙(지금의 게이오대학)에 입학해서 일본어를 배운다. 17세의 윤치호는 도시샤(동지사) 대학에 입학, 영어를 배운다. 동지사대학은 나중에 윤동주 시인이 공부를 한 곳이다. 그리고 김양한은 요코스카조선소에 들어가서 조선 기계 설계 및 항해술을 익혀 1883년 졸업증서를 받는다.

가장 어린 유학생이었던 12살의 박명화는 게이오 의숙에서 영어를 배우다가 나중에 도시샤대학으로 옮겨서 일본어를 배운다. 윤치호, 유길준, 박명화, 유정수가 어학연수 목적의 유학생이었다면 임태경, 이원순, 김재우, 박인순은 구리와 피혁제조 등의 기술을 익히기 위해 파견된 과학기술 분야 유학생이었다.

조선은 이어서 1881년 일본 메이지왕 생일에 또다시 축하 사절단 수신사를 보내며 이 가운데 유학생을 파견한다. 조병호를 수신사로 28명의 사절단 가운데는 장대용, 신복모, 이은돌 등 3명의 유학생이 포함됐다. 장대용과 신복모는 육군 호산학교에, 그리고 이은돌은 육군교도단에 입학한다.

유길준과 유정수는 1년 6개월간 공부하고 1883년 박영효를 따라 귀국한다. 1년 6개월간의 짧은 일본 유학에서 그들이 한 것은 일본어 습득이었다. 깊이 있는 학문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당시 재일한국 유학생들은 박명화, 윤치호를 제외하고 모두 20대를 넘긴‘늙다리 유학생’으로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한일 유학사에서 도시샤대학과 게이오 의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도시샤는 일본의 첫 미국 유학생인 니지마조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1875년 세운 도시샤 영어학교의 후신이다. 게이오 의숙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학교다. 후쿠자와는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한때 일본의 1만엔 화폐에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조선 조정이 2차례 파견한 수신사에 유학생이 따라가 일본에서 공부한 이후 조선의 일본 유학생은 급격히 늘어난다. 1881년부터 1886년까지 일본에 유학 간 조선 학생은 67명인 것으로 파악된다. 순탄하게 이뤄지던 조선의 일본 유학생 파견은 개화파가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일대 전화기를 맞는다. 김옥균 등 개화파의 후원으로 파견됐던 유학생들은 모두 소환됐고, 일부는 귀국 후 처형되기도 한다.

이후 일본 유학생 파견은 10여년간 중단되고, 조선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도 막히게 된다. 조선 학생의 일본 유학은 그 시초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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