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4일] 이스라엘 건국한 날

2009년 버마, 아웅산 수치 여사 투옥

2009년 5월14일 버마의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64) 여사가 투옥됐다. 총 13년간 가택에 연금돼 온 수치 여사가 ‘미국인의 자택 잠입 사건’과 관련해 법을 위반한 혐의로 이날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된 것이다. 수치 여사는 가정부 2명과 함께 옛 수도인 양곤의 ‘인세인 감옥’으로 이송됐다.

이번 수감은?존 윌리엄 예토(Yettaw·당시 53세)라는 미국인 남성이 호수변에 있는 수치 여사의 자택에 헤엄을 쳐서 잠입한 뒤 이틀간 머물고 몰래 빠져나오다 체포된 데 따른 것이다.

군정 치하의 버마에서는 심야에 친족이 아닌 손님을 맞은 사람은 즉각 현지 관리에게 통보해야 한다. 또 외국인 손님은 아예 버마인 집에서 숙박할 수 없다. 수치 여사 변호인측은 수치 여사와 가정부들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최고 징역 5년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예토가 수치 여사의 자택에 잠입한 동기와 잠입 후 행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치 여사의 변호인측은 예토의 행동이 개인적인 모험심에 따른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예토 역시 출입금지 지역에 불법 침입한 혐의와 이민법을 위반한 혐의로 같은 날 기소됐다. 그는 법원에서 7년 노동구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이 공식적으로 끝나는?5월27일을 불과 2주 앞두고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군부측에서 함정을 팠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실제 예토는 같은 해 8월16일 당시 버마를 방문했던 짐 웹 미국 상원의원과 함께 항공편으로 미얀마 양곤을 떠나 태국으로 향해 모국으로 귀국했다. 당시 버마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가족들의 품에 돌려보내준 것”이라고 했고, 미국은 “선의의 석방을 감사하게 여긴다”고 화답했다. 야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이끌고 있는 수치 여사는 1988년부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공로로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받지는 못했다. 2012년 6월 중순 수상하게 됐다.

군정의 탄압을 받아 여러 차례 가택연금을 당했던 그가 3년 뒤 국회의원이 됐다. 수치는 2012년 4월1일 실시된 하원 의원 보궐 선거에서 당선, 미얀마 국회에 진출하게 됐다. 그가 이끄는 NLD도 전체 45개 선거구 중 43곳에서 승리했다.

2000년 日 총리 오부치 게이조 사망

2000년 5월14일 오후 4시7분 일본의 정치가로 당시 총리를 지냈던 오부치 게이조(小? ?三, おぶち けいぞう)가 사망했다. 향년 64세.

그는 재임 중이던 2000년 4월2일 뇌경색으로 갑자기 쓰려졌다. 쓰러진지 43일 만인 이날 입원 중이던 도쿄 준텐도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총리직은 이미 4월5일 모리 요시로가 승계한 상태였다.

12선의 중의원이며, 1998년 7월30일부터 2000년 4월5일까지 615일간 재임한 제84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일본 정계의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었다. 또 ‘하루를 일생처럼’이라는 삶을 지향했던 근면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재임기간은 615일로, 14번째 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다.

1955년 바르샤바조약기구 창설

1955년 5월14일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동구권 국가들을 하나로 묶는 바르샤바조약기구(WTO)가 체결됐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항하기 위해 체결된 ‘동구 우호 상호원조 조약’이라는 군사동맹 조직으로, 조약체결국은 소련·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알바니아·동독 등 8개국이다. 조약의 내용은 무력 공격의 위협에 대처하는 협의 및 무력 공격에 대한 공동 방위가 근간을 이룬다. 이날 서명국들은 국제문제 해결에 있어 무력사용의 자제에 동의하고 군비철폐와 평화를 위해 협조할 것을 다짐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팔레스타인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65만 명의 유태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지도자의 목소리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들의 시오니즘 운동을 이끌었으며 신생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으로 선출된 벤 구리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스라엘 건국’을 알렸다.

유태인들은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을 계기로 시오니즘 운동에 불을 댕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 세계로부터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최대 강국으로 떠오르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친(親)시오니즘에 힘입어 팔레스타인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가와 유태국가의 두 부분으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유태민족에게는 비원의 성취였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유태인 테러단체의 폭력을 피해 원주민의 70%에 해당하는 72만 명이 돌아올 기약도 없이 서둘러 살던 곳을 떠났다. 그리고 이들은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유태인들은 땅 문제에 관해 자신들이 피맺힌 한을 풀면서 또 다른 민족에게 피맺힌 한을 고스란히 넘겨줬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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