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이렇게 나는 오늘도’ 김동리(1913~1995)
오늘 아침엔 월급 봉투로 연탄을 들이고
어저께는 문인협회의 위원에 뽑혔습니다
내일엔 다방에 나가 악수를 널어 놓고
저녁때엔 어느 편집장과 술을 마실 예정입니다
지난해엔 둘째 아이의 임파선 수술을 보았고
이달엔 ‘섰다’에 미쳐 밤을 새고 다닙니다
시는 어려서부터 일찍이 손을 대인 것
소설은 약관에 이미 당선이 되었지만
아직 어느 나무 그늘 아래도 내 마음 쉴
의자 하나 놓여 있지 않습니다
봅소서, 나를 지키는 그대의 맑은 눈동자
앉으나 서나 가나 머무나 언제 어디서고
나에게서 떠남 없는 그대의 영원한 눈길이여
이제 나는 머리가 벗겨지고 등이 굽은 채
서울역이나 서대문 가는 전차를 잡으려고
동대문 모퉁이를 헐덕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봅소서, 이렇게 나는 오늘도 찬 바람
흐린 햇빛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 김동리가 남긴 詩(유고시와 대표시, 그리고 해설과 평론 모음)권영민 편, 문학사상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