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신학년제’와 ‘설국열차’ 그리고 ‘반개혁 낙인찍기’
[아시아엔=허병두 서울 숭문고 교사, 시인, (사)‘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전 이사장, 전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위원] 최근 정치권과 교육계 일각에서 ‘9월 신학년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1997년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교개위)에서 처음 논의된 이래 세 차례나 진지하게 검토하다가 제쳐 놓은 바 있다.
당시 교개위에서 1차 논의할 때 필자는 56명 전체 위원 가운데 오직 4명밖에 없는 현장교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현장교사인 필자조차 그 논의가 있는지도 모르게 진행됐다. 결국 필자는 관련 공청회에서 플로어에 앉아 그간의 사정과 저의를 추궁해야 했다.)
교개위 위원장에게 홀로 불려가 질책을 받아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막는다면 사퇴하겠다고까지 말하며 버티기도 했다. 초중고 1천만명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인데도 당시 교개위는 일부 소수 학생들을 위하여 역시 부위원장 등 힘 있는 몇몇 위원들이 강력히 주장하면서 9월 신학년제를 일방적이고 권위적으로 몰아붙이는 분위기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당시 필자는 직접 통일부를 통해 북한은 1996년 ‘4월 신학년제’로 옮긴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9월 신학년제 추진은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25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장일단이 있을 뿐, 지금의 ‘3월 신학년제’가 우리 생활리듬에 더 맞는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30여년 전 88올림픽을 앞두고 시행했던 ‘서머타임제’가 세계적 추세라 했지만 몹시 불편해서 이후 안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최근 들어 서머타임제는 기존 시행국가에서도 폐지되는 추세다. 이번 ‘코로나사태’를 계기로 전 세계가 ‘3월 신학년제’로 전환하면 훨씬 인간적이고 자연의 순리에 맞을 듯싶다.
표준시처럼 진짜 일본의 잔재조차 바꾸기 힘들다. 친일 청산을 했다고 내세우는 북한조차 평양 표준시를 도입했다가 3년만에 다시 동경 135도 표준시로 다시 돌아왔다. 최근 일부에서 제기된 ‘9월 신학년제’ 주장을 보면서 개혁이란 정말 어려운 일인데 너무 쉽게 생각한다든지, 혹은 자신들 이익만 앞세우는 것 같아 안타깝다.
특히 개혁을 위한 개혁만 내세워 안 그래도 고달픈 세상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진짜 선택과 집중을 해도 성공하기 어려운 개혁인데 개혁을 하자며 오히려 개혁을 망치는 것이다.
교육개혁이 100%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전 대통령교육개혁위원이란 직함을 내세워서 그나마 이런 글이라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개혁을 앞세운 의도에 반대하면 ‘반개혁론자’로 쉽게 낙인을 찍는 분위기마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잘못된 정보였음에도 마치 9월 신학기제를 도입하지 않으면 통일반대론자로 낙인 찍을 것 같던 1997년도 당시 분위기보다 더하여 걱정스럽다.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인 코로나사태를 감안해 올해’ 1학기를 ‘자유학기제’, 또는 ‘특별학기제’로 한시적으로 인정하고 2학기를 지금처럼 그대로 2학기로 두면 충분할 일이다. 실상 이처럼 간단한 것조차 동의와 합의가 쉽지 않을 거다. 그런데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제도로 가자고 하며 이를 개혁이라 한다. 다시 말하지만 9월 신학년제로 바꾸는 것은 절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는 마치 설국열차 뒷칸 승객들, 즉 21학번이 되는 학생들에게 앞칸 승객들 같은 ‘가짜환상’을 내세우며 소수 유학생을 위해 평생 고역을 짊어지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잠시만 참으라고 할 수가 없다. 이들의 피해는 열차가 멈출 때까지 다른 칸으로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설국열차처럼 임종할 때까지 계속 된다.
이들을 나눠서 분산해도 앞칸의 호화로운 세상을 위해서라면 도대체 왜 이런 고역을 감수해야 하는가. 9월 신학년제를 도입한 나라들의 교육은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가? 개혁의 방향을 왜곡하고 동력을 잃게 만들면 개혁은 개악과 동의어가 된다.
아래는 한겨레신문 4월 7일자에 실린 필자의 기고문이다.
9월 신학기제’ 도입을 하자는 주장이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안전 문제 때문에 개학을 늦추자는 것과 9월 신학기제를 도입하자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코로나19 사태에 맞서 지혜를 모으고 온 힘을 쏟아야 할 중차대한 시기에 제기되는 이러한 주장은 우리 교육계와 사회 전반에 엄청난 혼란과 손실을 줄 수있다.
9월 신학기제는 1997년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에서 처음 논의된 이래 세차례나 진지하게 검토하다가 제쳐 놓은 바 있다. 현행 제도와 9월 신학기제는 각각 장단점이 맞서 있다. 오히려 북반구 국가에서는 봄에 학년을 시작하는 것이 오전에 일과를 시작하는 것처럼 훨씬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9월 신학기제를 도입하자는 쪽에서는 장점은 지나치게 과장하고 단점은 축소하거나 외면하고 있다. 특히, 제도 변경에 따른 천문학적 비용(2014년 한국교육개발원 추산10조5천여억원), 쉽게 산출하기도 불가능한 일손과 시간의 부담을 그리 쉽게 무시하면 안 된다.
9월 신학기제는 정확히 말하면 9월 신학년제다. 지금 도입하면 가장 큰 피해자는 가뜩이나 불안하고 불편한 현 재학생들이다. 올해 9월에 대학 입학을 할 수는 없으니 고3과 재수생은 내년 3월에 진학하고, 고2는 내년 9월에 입학할 것이다.
2021년 2학기부터 이들이 다니는 대학의 북새통을 생각해 보라. 모든 게 갑작스럽게 두 배가 되며 이들이 겪는 피해는 졸업후에도 계속된다. 이들은 평생 취업 같은 경쟁은 물론 각종 혜택에서도 현저하게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를 줄이려고 3개년에 걸쳐서 2개월씩 앞당긴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충격만 조금 줄 뿐 일방적인 피해를 평생 받아야 할 당사자인 재수생부터 고교생, 중학생, 학부모들이 과연 동의할 수 있을까? 올해부터 고3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는데 형평성에 어긋나는 이러한 정책변경이 쉽게 받아들여지기도 어렵다.
반면 9월 신학년제 도입의 기대 효과는 침소봉대하며 환상을 심어 준다. 우리 교육을 국제 추세에 맞출 수 있으니 좋다는 주장만 해도 사실상 유학생 집단에 국한된다. 1997년 처음 도입을 검토할 때에도 외국으로 유학을 간 10만여명의 초중고 학생들이 뒤처지지 않게 할 수있다는 장점이 강조되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오는 20만여명의 유학생, 특히 중국 유학생을 대학에서 받기 쉽게 해달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일본이 4월에 시작하니 현행 제도가 친일 잔재라는 말도 지나친 견강부회다. 춘삼월 봄에 모든 일정을 새로 시작하는 것은 삼라만상의 리듬에 맞아 우리 전통과 일상생활에 자연스러울 뿐이다.
9월 신학년제가 도입된다면 지금 초중고교는 2학기를 혹한기인 1월 셋째 주부터, 1학기는 혹서기인 8월 둘째 주에 앞당겨 열어야만 한다. 어른에게도 너무 춥고 무덥다. 북한이 1996년에 4월 신학년제로 바꾼 점도 시사하는 바가 여러 가지 있다.
10조원이 훌쩍 넘을 직접비용이면 50만원정도의 교육용 노트북을 2천만명 이상에게 보급할 수 있다. 또한 1만곳이 넘는 전국 초중고교에 해마다 1억원씩 10년 동안 줄 수 있는 규모다. 개개인이나 학교가 일구어낼 성과들은 9월 신학년제 도입보다 훨씬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9월 신학년제는 ‘계륵(鷄肋)’일 뿐이다. 아무리 남의 떡처럼 커 보여도 치명적인 희생자 집단을 만들고 온갖 낭비와 손실,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취해야 할 지상 목표가 아니다. 현재의 난국을 해결하고 새로운 ‘교육 한류’의 큰길을 열기 위하여 개혁의 방향과 동력을 옹골차게 가다듬어야 한다.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는 개혁의 걸림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