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사 전문] “권근술 선배님, 한겨레공동체 똘똘 뭉쳐 새 희망 만들겠습니다”

권근술 전 한겨레 사장

[아시아엔=김형배 한겨레신문사 사우회장, 방송문화진흥회 감사] 한겨레 안에서는 권근술 선배님과 비교적 일찍부터 만나고 최근까지 뵌 사람은 아마 저일 겁니다. 처음 만났을 때나 마지막 뵈었을 때나 만남은 항상 고통과 수난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첫 대면은 제가 대학 4학년생일 때입니다. 선배님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 한복판에서 동료 기자들과 제작거부 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편집국 안에서 뵈었던 분이 안종필, 권근술, 성유보, 이부영 선배님들이었죠. 이부영 선배님을 제외하고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셨는데, 당시 시민과 학생들은 성금을 모아 백지광고를 채움으로써 고난 속에서 투쟁을 이어가는 기자들을 도왔습니다. 그때 만났던 그분들을 저는 다시 한겨레에서 만나게 됩니다. 첫 만남 이후 13년 성상이 흘렀어도 한결같이 맑고 순수한 선배님들이셨습니다.

권근술 선배님은 해직 후 광화문에 조그만 사무실을 차렸는데, 이곳이 <한국논쟁사> 전집을 낸 청람출판사입니다. 그곳은 고 심채진, 고 최병진 선배님과 동아투위분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45년이 지난 작년 늦가을에 늦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급히 찾았던 경기 산본 댁에는 한층 수척해진 몸에도, 따스한 표정을 잃지 않으신 선배가 계셨습니다. 이미 4년 전쯤 언어장애로 장기간 침술치료를 받아오셨는데,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쯤 파킨슨병 판정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겨우 동네에나 조심조심 걷곤 하셨다가 지난해 갑자기 중심을 잃고 쓰러져 늑골과 다리를 다치시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만남이 저는 가슴에 맺혀 있습니다. 평생 후배들과 친구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이 분이 사실 날이 이제 앞으로 얼마 안 남았음을 직감하게 되었으니까요.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그냥 감사해야하는 상황이 너무도 서글퍼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얼굴도 마주 못한 채 결국 선배님 품에 안겨서 한참 흐느꼈고 기어이 선배님과 저는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그날 들었던 불길함이 오늘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픕니다. 회사 안팎의 선후배들에게 제 예감을 즉각 알렸습니다. 한 후배는 “한 시대가 이렇게 가는군요”라고 한탄했습니다.

그것이 불과 5개월 전 일입니다. 이제는 다시 뵐 수 없는 정다운 모습,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얼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편찮으실 때에도 늘 후배들을 기쁜 얼굴로 맞아주셨던 선배님이 그립습니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깊은 상실감에 슬픔은 더하고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선배님 평소 여쭙고 싶었으나 못했던 것 하나 있습니다. 6년여 짧았던 동아일보 기자 생활에 비해 너무도 길었던 가시밭길 해직의 세월을 견디기면서도 어떻게 그리 따스한 가슴을 지킬 수 있으셨는지? 얼마나 가슴이 더웠으면 그 열기가 동지들과 후배들, 멀리 북녘 아이들한테까지 미칠 수 있었는지요? 또한 그 온화한 얼굴, 다정한 태도 그 어디에 민주언론의 그처럼 강인한 열망과 굳은 의지, 민족 화해의 결기가 숨어 있었는지요? 정말 묻고 싶은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명쾌한 해답들을 해주실 선배님은 왜 아무 말씀 없으신가요?

선배님! 저희들은 선배님이 저희 곁에 늘 계셔서 그동안 늘 행복했습니다. 이 거친 황야, 척박한 동토 위에서도 선배 뒤를 따라 걸으며 나름 행복했던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생전에 좀 더 따뜻하게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운명에 윤회가 있다면 다음 생에 꼭 돌아오셔서 우리 곁에 계셔 주십시오. 그렇다면 이별을 슬퍼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헤어짐이 꼭 절망적인 슬픔만을 남기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선배님이 바라시던 한겨레의 융성 중흥을 꼭 이뤄내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한겨레가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듯이 우리도 선배님이 품으셨던 한겨레정신과의 새로운 만남을 착실히 준비하겠습니다.

선배님! 우리와 늘 함께 하실 것이기에, 지켜보실 것이기에 이제 선배님을 편히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승에서 짊어지셨던 짐은 모두 훌훌 벗어놓으십시오. 저희들이 받아들고 선배님이 가신 그 길로 다시 힘차게 나아가겠습니다. 한겨레 전체 공동체가 똘똘 뭉쳐서 새로운 희망 속에서 선배님들의 새 세상을 향한 벅찬 사랑의 노래를 따라 부르겠습니다.

권근술 선배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평안히 눈을 감으소서.

2020년 3월 18일 한겨레신문사우회 회장 김형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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