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7일]중국인들이 서울에서 무력시위벌인 날

2010년 4월27일 새만금 방조제 준공

2010년 4월27일 한국의 전라북도 군산시와 김제시, 부안군 앞바다를 전부 아우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가 준공됐다. 세계기네스위원회는 총 연장 길이가 무려 33.9km인 새만금 방조제(Saemangeum Seawall)를 기네스북에 세계 최장 방조제로 등제했다.

일주일 뒤인 같은 해 5월2일 한국농어촌공사 홍문표 사장은 전북 군산시 새만금 신시도광장에서 영국의 기네스 월드레코드사의 크리스티 친 기록제정관으로부터 ‘기네스 인증서’를 전달받았다. 새만금방조제는 32.5km의 네덜란드 쥬다찌 지구 압슬루트 방조제보다 1.4km 더 긴 세계 최장 방조제로 공식 인증 받았다.

새만금방조제의 이번 기네스 등재는 19년간 설계부터 준공까지 순수 우리 기술로 지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크다. 방조제 축조에는 2조9000억 원, 연인원 237만 명, 덤프트럭과 준설선 등 총 91만 대의 건설장비가 동원되고 토석 1억2300만㎥가 사용됐다.

2008년 서울 성화 봉송 중국인 폭력시위

2008년 4월27일 서울에서 열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에서 재한중국인 및 중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인과 다른 외국인들에게 폭력을 행사, 여러 명이 부상했다.

2008년 4월 27일 오후 3시 반경 서울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에서 성화가 출발했다. 한국 경찰 9300여 명이 안전을 위해 배치됐다.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광장에는 티베트 독립문제와 중국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기독교사회책임 등 한국 시민단체 회원 18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또 이에 맞서는 중국인 6500여 명이 이날 오전부터 중국 국기 등을 들고 집결해 있었다. 중국인은 그들에게 구호를 외치며 강하게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충돌은 이미 성화 출발 전부터 이어졌다. 한국 시민단체 사람들은 중국의 탈북자 송환과 티베트 문제에 관련해 “인권이 없는 나라에서는 올림픽도 없다(No Human Rights, No Olympic Games)”를 외치며 시위했다.

이에 대해 중국 시위대는 “사랑한다 중국”, “중국의 진정함을 세계에 알리겠다”, “티베트는 영원히 우리 중국 땅” 등의 피켓을 든 중국인들이 국기를 앞세우고 모여들었다. 욕설이 오가는 등 사태가 격해지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돌과 스패너(금속절단기), 미개봉 음료수캔, 국기 대를 던지기 시작했다. 이 두 집단을 갈라놓으려는 경찰병력 사이로 이 물건은 계속 한국 쪽으로 무차별 투척됐다.

이날 한중 양국 시민들의 충돌로 한국에서는 중국 유학생 2명이 입건됐다. 티베트 평화연대는 “이번 사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대중의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무분별한 감정격화는 피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는 부상자에게 위로의 뜻을 전달하였고, 별도의 사과 발언은 없었다.

2008년 탈레반 등진 아프간 대통령

2008년 4월27일 하미드 카르자이(1957년 12월24일~, 파슈토어: ???? ????, 다리어: ???? ?????) 아프가니스탄 현 대통령은 수도 카불에서 열린 공식 행사에서 무장세력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 피신했다.

하미드 대통령은 2004년 12월7일부터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칸다하르 주의 포팔자이족 출신인 카르자이는 카불에서 공부한 뒤 인도로 유학해 대학을 마쳤다. 포팔자이족은 18세기 중반부터 1973년 자히르 샤 전 국왕이 축출때까지 아프간을 통치한 왕족이 속한 부족으로써 그는 1999년 부친의 피살 이후이 부족의 족장이 됐다.

인도에서 돌아온 뒤인 1980년대에 그는 옛 소련군의 침공에 맞선 무장투쟁에 나섰다.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물러가자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의 지원 아래 수립된 정권에서 1992년 외무차관을 지낸 적이 있다.

탈레반 정권 초기에는 탈레반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1996년엔 탈레반 정권으로부터 유엔 주재 대사직을 제의받을 정도로 관계가 좋았다. 하지만 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득세에 염증을 느낀 그는 이 제의를 거부, 탈레반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99년 부친이 탈레반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이때부터 탈레반은 그에게 적이 됐다. 2001년 10월 미국의 아프간 공습이 시작되자 그는 아프간 남부로 들어가 반(反)탈레반 세력 규합 활동을 펼쳤다. 2001년 말 아프간에서 탈레반 정권이 붕괴된 뒤 탈레반 정권의 마지막 붕괴에 커다란 역할을 해낸 것으로 평가받아 독일 본에서 6개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정파회의에서 미국의 강력한 지원 아래 수반으로 선출됐다.

6개월간 임시정부 수반직을 훌륭히 수행해 탁월한 지도자라는 평가받았다. 그는 국제무대를 누비며 수십억달러의 재건 원조를 받아내는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고 국내 정치에서도 권력배분을 놓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군벌들의 이해관계를 막후에서 조정했다.

결국 2002년 6월 종족대표자 회의에서 카르자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또 다시 차기 과도정부 수반으로 재선출됐다. 그리고 2004년 12월에는 과도정부 수반에서 대통령으로 승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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