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선출된 날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 선출

2005년 4월19일 제265대 교황에 독일 출신의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인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이 선출됐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이다. 베네딕트 16세(Benedict XVI)로 이름을 정한 라칭거 추기경은 이날 오후 베드로 광장에 운집한 신자들의 환호 속에 성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 “형제자매들이여, 위대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추기경들이 신의 일터에서 일하는 어리석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선출했다. 나는 여러분의 기도에 내 자신을 맡긴다”며 첫 축복을 내렸다.

앞서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비밀 추기경 회의)가 열린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굴뚝에서는 회의 이틀째인 이날 오후 5시50분(한국 시각 20일 0시50분)께 교황 선출을 알리는 흰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베드로광장에서 교황 선출 소식을 기다리던 수만 명의 신자와 참배객들은 깃발을 흔들며 “교황 만세”를 환호했다.

이날 예정보다 1시간쯤 일찍 굴뚝에서 피어 오른 연기가 처음에는 검은색인지 흰색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으나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새 교황 선출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서 공식적으로 교황 선출이 확인됐다.

단 24시간 만에 교황이 선출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23년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을 역임하면서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알려진 라칭거 추기경은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며 최측근에서 교황의 대리인 역할을 맡아 온 인물로 새 교황의 유력한 후보로 지목받아왔다.

2004년 김정일-후진타오 첫 정상회담

2004년 4월19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3박4일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김 위원장은 베이징 중난 하이(中南海)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사람은 가장 먼저 교착상태에 놓여있던 6자회담과 북한 핵 문제를 주요 의제로 논의했다. 북한 경제난과 양국 간 관계 개선 방안도 논의했다.

김 위원장은 사흘간 중국에 머물면서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원자바오 총리, 쩡칭훙 국가 부주석 등 4세대 지도부와 잇따라 회담을 가졌다. 김 위원장은 미국의 적대정책에 대비한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언급했으며, 장쩌민 중앙군사위 주석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또 원자바오 총리에게 부족한 식량과 에너지 지원을 거듭 요청한 뒤 상호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중국 방문 뒤 귀국길인 4월22일 김 위원장이 돌아오던 길목이었던 신의주부근 용천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1995년 미 오클라호마시, 극우파 폭탄테러

티머시 맥베이(Timothy Mcveigh)

1995년 4월19일 오전 9시 미 중부 오클라호마 주도 오클라호마시티의 연방 기구 사무실 빌딩에서 강력한 차량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폭탄을 실은 트럭이 연방청사건물 주차장에서 굉음을 내며 폭파돼 9층 건물이 가라앉았다. 어린이 9명을 포함한 사망자 168명, 부상자 500명이 발생했다.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기 전까지 미국 역사상 최대의 참사로 기록됐다.

범인들은 이날로부터 꼭 2년전 일어난 다윗파 집단자살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미국의 사교(邪敎)집단인 다윗파 광신도들이 1993년 4월19일 집단 자살했다. 경찰과 대치하며 51일 동안 투항해 온 이들이 자살을 택한 것은 FBI의 기습작전에 교주 데이비드 코레쉬가 자살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광신도들의 방화로 95명 중 86명이 사망했다.

극우파 세력들이 클린턴 행정부의 허약한 정치에 불만을 표출했다는 해석도 있었다. 당시 27세였던 티머시 맥베이(timothy mcveigh)가 범인으로 기소됐고 같은 해 6월13일 사형이 선고됐다. 2001년 6월11일 인디애나주 연방 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본 테러 사건 이후 안전 법 및 폭탄에 대한 규제 법률이 개정됐다. 2000년 4월 19일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 5주기 기념으로 Alfred P. Murrah Federal Building 옆에 희생자 168인을 위한 메모리얼 기념비를 준공하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를 실시했다.

1975년 인도 최초 무인인공위성 아리아바타 발사

1975년 인도가 최초로 제작한 무인인공위성(無人人工衛星) 아리아바타(Aryabhata)호가 발사됐다. 위성은 방갈로르 근처의 피냐(Peenya)에서 조립됐지만, 1975년 4월19일 소련에서 소련제 로켓으로 발사됐다. 무게는 360㎏이며 전리층(電離層)의 상태관측, 태양에서 나오는 중성자와 감마선 측정, X선 천문학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장비를 실었다. 궤도상에서 5일째 되던 날 전기동력장치 고장으로 과학연구용 장비의 전원이 꺼졌다. 그러나 작동 중이던 5일 동안에는 유용한 자료를 많이 얻었다.

아리아바타(Aryabhata)는 5세기 후반기에 활약한 인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다. 저서<Aryabhatiya>에서 후세의 L. 오일러와 같은 방법으로 부정방정식 ax±by=c의 정수해를 구해 그리스의 디오판토스를 앞섰다. 사인과 평면삼각법 사용도 프톨레마이오스를 앞섰다.

원주율을 3.1416으로 산출했다.

1960년 한국에서 4·19 혁명

1960년 4월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대학별로 총궐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나섰다.

정의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4.19혁명의 불길이 타오른 것이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그리고 일반 시민들도 시위대열에 합류해 3·15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민주정권 수립을 요구했다. 시위대가 경무대로 몰려가자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무차별 발포해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흥분한 시위 군중은 경찰 지프차를 빼앗아 불사르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공격했다.

독재타도를 부르짖는 시위는 부산, 광주, 인천, 청주 등 전국에서 이어졌다. 당황한 정부는 오후 5시부터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를 동원해 무차별진압을 감행했다.

밤 10시쯤 계엄군이 진주하면서 시위는 수그러들지만 이날 시위로 서울에서만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전국에서 6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25일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라며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다시 시위가 거세졌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하고 학생들은 학교로의 복귀하면서 혼란한 시국이 가라앉았다. 같은 해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7월29일 민의원·참의원선거가 실시돼 민주당이 압승했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의 제2공화국이 출범한 것이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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