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9일]핵무기 없는 한국전쟁 스톡홀름서 비롯?

2010년 한국, 에티오피아 출신 귀화 허가…난민 중 최초

2010년 3월19일 에티오피아 출신 난민이 한국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한국이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해 난민 지위를 부여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날 한국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는 에티오피아 출신 난민 신분인 38세의 A씨에게 귀화 허가를 해 한국 국적을 부여했다. 법무부는 이날 오후 그에게 귀화증서를 발급했다.

법무부는 당시 “A씨에 대해 적격심사를 벌여 그가 사회통합프로그램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하고 본인 명의의 주택을 소유하는 등 기본 소양과 생계유지 능력을 갖춘 것으로 판단해 귀화 허가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법무부 담당 공무원은 당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일반귀화의 경우 통상 1년6개월 정도 심사 기간이 필요하지만 A씨에 대해선 난민협약 정신을 존중해 1년 만에 귀화 허가를 했다”고 설명했다.

A씨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국립대에 다니면서 민주당원이자 반정부단체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2001년 8월 국내에 들어왔다. 그는 이듬해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난민 지위를 신청했다. 당시 법무부는 A씨의 진술에 진정성이 있고, 에티오피아 정부가 야당과 학생의 반정부 활동을 탄압하는 점을 고려할 때, 귀국 당시 박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2005년 9월 그를 난민으로 인정했다.

A씨는 그 뒤 한국의 선문대에서 신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 국적 취득 당시 단국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과정 공부도 하고 있었다. 그는 또 에티오피아 출신 부인과의 사이에 딸을 키우고 있는데, 한국 국적 취득에 따라 혼인신고도 할 수 있게 됐다. 귀화증서를 받은 A씨는 “안전이 보장되고 복종 없이 신념대로 살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1994년 80% 넘는 지지로 탄생한 벨라루스 대통령

1994년 3월19일 알렉산드르 리호라비치 루카셴코(벨라루스어 Алякса?ндр Рыго?рав?ч Лукашэ?нка 1954년 8월30일 출생)가 벨라루스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그는 현직 대통령이기도 하다.

소련 소비에트 최고회의 의원으로 활동했고, 1991년 최고회의에서 벨라루스(당시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소련의 해체를 반대했던 사람이다.

벨라루스가 소련에서 분리·독립한 후에는 반부패 운동가로 유명해졌으며 독립 이후에 새로 제정된 벨라루스 헌법을 통해 처음 치러진 1994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 벨라루스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당선은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 제시, 강력한 부패 척결 의지와 민족주의 주장 등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뒤 차츰 독재로 흘렀다는 게 중평이다. 서구 국가들은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부르기도 한다. 1996년에 대통령 임기를 연장, 2001년에 재선됐다. 2004년에는 다시 헌법을 개정해 초대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폐지했다. 2006년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압도적인 지지로 3선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0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는 80%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4선에 성공했다.

벨라루스 정부는 2012년 3월 현재까지도 야당 지도자와 야권 성향의 시민운동가, 언론인 등 100여 명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말 대선에서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되면서 야당이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야당 대선 후보를 포함한 600여 명의 야권 지지자들이 무더기로 체포됐다.

유럽연합(EU)과 미국은 루카셴코 정부를 강력 규탄했다. 루카셴코 대통령과 그 측근 인사들, 벨라루스 고위 경찰관과 판사 등에 대한 비자발급 중단 등의 제재를 가할 정도였다.

벨라루스 정부는 자국 주재 EU 대표 및 폴란드 대사를 추방했다. 이에 EU가 다시 벨라루스에 주재하는 27개 회원국 대사들을 전원 소환키로 하는 등 갈등이 첨예화됐다.

그는 러시아와 벨라루스 양국이 조인한 러시아-벨라루스 연방창설조약이 1999년 12월8일에 발효되면서 2000년 1월에 러시아-벨라루스 연방 초대 최고 국가 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1997년에는 한국을 방문,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열기도 했다.

1950년 원폭 반대 ‘스톡홀름 호소문’에 지구촌 5억 명 서명

1950년 3월19일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세계평화옹호대회 상임위 마지막 날이었다. 이날 ‘핵무기사용 절대금지’에 서명할 것을 호소하는 ‘스톡홀름 호소문’이 발표됐다. 2차 대전 종료 뒤 핵 군비 경쟁에 반대해 벌인 대규모 평화운동의 하나였다. 당시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수소폭탄 개발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호소문은 ‘핵무기 무조건 금지’와 ‘국제관리기관 설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최초로 원자병기를 사용한 정부를 인류에 대한 범죄자로 간주할 것도 규정했다. 호소문 초안은 프랑스의 핵물리학자이자 의장이었던 장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 박사가 작성했다.

냉전에 따라 발발할 지 모르는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는 전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미국과 소련, 중국, 동독, 서독,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의 총5억여 명이 서명했다.

한국전이 발발한 해에 발표된 ‘스톡홀름 호소문’ 덕택에, 한국인들과 참전한 국가의 병사들이 핵무기 재앙을 면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분석도 있다.

1644년 명나라 멸망

1644년 3월19일 새벽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북경의 외성을 점령하자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다. 16제 277년의 명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숭정제의 자결 직후 이자성이 이끄는 수십만의 반란군이 북경 내성으로 입성했다.

숭정제는 자살 하루 전인 18일 자신의 세 아들을 평민차림으로 변장시켜 각각 그들의 외가로 피난시킨 후 황후와 후비들에게는 자결하도록 명했다. 황후 주씨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후비 가운데서도 자결하는 이가 많았다. 각각 15세, 6세인 공주들은 황제가 직접 칼로 찔렀다. 명 왕조를 장악한 이자성은 숭정제와 주황후를 황제-황후의 예로써 장사지내 주었다.

첫째인 장평공주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같은 해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뒤 이자성을 격파,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국 지배를 선언했다. 중국 남부에서는 명나라 황족과 관료들이 남명정권을 세우고 청나라에 저항했으나, 운남에서 미얀마까지 도망쳤던 영력제를 마지막으로 모두 청조에 의해 멸망했다. 복건에서도 정성공(鄭成功)이 대만을 점거하고 저항했으나, 정씨 왕국은 후에 청나라에 항복했다. 장평공주는 뒷날 이자성군을 진압한 청나라 태종의 도움으로 평범한 일생을 누렸다.

1724년 명나라의 대왕 주이의 손자, 주지련이 청나라 옹정제로부터 1등 연은후의 작위를 받고, 이후 이 자손은 명나라의 제사를 이어갔다.

명나라 역사를 기록한 <명사기사본말>과 <명계유문>, <명사> 등에 따르면, 명조 마지막 태자를 포함한 숭정제의 아들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자성을 따라서 패퇴, 나중에 중이 됐거나 행방을 모른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청나라 조정에 체포돼 죽었다는 설, 제3의 농민군 정치세력에 넘겨져 살해됐다는 설도 있다.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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