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특집④] ‘근대시민적 개인’ 위한 정부수립 지향
[아시아엔=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방송문화진흥회 전 이사] 통치방식으로서의 근대 민주주의는 개인(individual)이 스스로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권리를 지키고 행사하는데 참여하는 과정이다. 오랜 기간 조선을 지배했던 유교적 사고구조에는 통치자와 피치자는 명백히 분리된 것이었고 동등하게 참여한다는 인식은 형성되지 못했다.
백성은 피지배를 당연시했고 통치자란 원래부터 별도로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인식구조에 머무르며 민주주의로 나가가지 못했다. 신민들은 통치자란 하늘(天)이 내린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좋은 시절’을 누리기 위해서는 최고 권력자는 요순(堯舜)같은 선정을 베풀기를 염원했고, 걸주(桀紂)와 같은 폭군을 만나지 않기를 기원해야 했으며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다스린다는 민주주의적 사고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문명개화와 함께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1894) 그리고 대한제국의 성립과 광무개혁(1897)으로 진전되며 피치자로부터 권리를 갖춘 개인 기본권 보장의 필요성은 나타났었다. 그에 따라 홍범 14조(고종 31년) 제6조와 제13조는 “인민(人民)으로부터의 출세는 모두 법령이 정한 세율로 해야 하고 임의로 명목을 더하거나 징수하고 남행할 수 없다는 것, 또 ‘민법과 형법을 제정하여 감금, 징벌의 남행이 없도록 하고 인민(人民)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는 제도상의 진전을 이뤄내고 있었다.
봉건체제의 신민 혹은 백성에서 독립된 개인을 의미하는 ‘인민’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근대 서구의 ‘시민’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었다. 또한 초기 수준의 견제와 균형에 따른 권력분립과 인권보호 차원의 재판소제도와 초기 의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중추원 제도 등도 1897년을 전후하여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갑오개혁과 홍범 14조 혹은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 1899)는 모두 국왕 주권을 전제로 했다. 대한국 국제3조는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옵신다”, 또 제4조는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시는 군권을 침훼할 행위가 있으면 그 행위는 신민의 도리를 결한 것이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불과 20년 뒤 전국을 뒤흔든 3.1운동은 민주주의라는 기준에서 볼 때 차원을 달리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혁명적 운동이었다.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 개인이 등장했고, 더 이상 개인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국가는 개인을 보호해야할 책임을 갖는 조직체로 설정되어 있다.
또한 신분제를 넘어 독립된 인격을 갖춘 개인으로 나아가는 데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지만 3.1운동 전 과정에는 신분제적 구조가 급격하게 붕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통사회에는 신분과 가문, 성적 구분이 특정 개인을 규정짓는 틀이었다. 양반과 상민, 그리고 중인과 노비 등으로 분리된 신분제 사회에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는 없었다.
18세기까지 성(姓)과 이름을 가진 숫자도 적었고, 양반으로 성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각 개인은 안동 김씨와 진성 이씨 등에 묻힌 문중과 가문의 소속으로 여겨진 것은 물론, 개인은 가문과 문중을 빛내야 하는 존재였다.
특히 여성은 밖으로 나다니는 것이 제한되고 수절(守節)로 상징되듯 가문의 명예를 위해 희생을 요구받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천주교 전래가 오래 지속되며 남다른 위치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졌던 여성들조차도 이름을 갖지는 못했다. 여성 순교자의 이름은 거의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갖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양반가의 남성들도 과거제를 통한 왕조체계에 편입되어야 계급상승을 지향할 수 있었고 그것조차도 상당부분은 본인 차원을 넘어 여전히 ‘가문’(家門)을 빛내는 수단이었다. 개인의 성공은 가문의 운명을 바꾸는 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이런 인식구조와 개념들이 개인을 움직이는 모티브로 보이지 않게 남아 작동되는 현실이기도 하다.
3.1운동은 근대 시민적 개인을 상정하고 있다. 나아가 개인이 모여 스스로를 다스리는 주권국가의 독립을 지향하고 있다. 3.1운동은 근대시민적 개인을 상정하며 독립 지향은 물론 스스로 정부(government) 만들기 운동으로 나아간 것에 민주주의사적 의미가 크다. 스스로 통치하기 위한 조직체로 정부를 만들겠다는 구상과 행동이야말로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3.1운동이 만든 민주주의운동의 산물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