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특집③] 일제 식민지 독립과 동시에 중국중심 세계관 극복

혼일강리역대국도. 이 지도는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10년이 지난 1402년 제작되었다. 당대 세계지도로는 가장 우수한 지도이며, 현존하는 우리나라 지도 중 가장 오래된 지도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은 독립국가라기보다 중국의 한 속국으로 그려졌다. 인도 활하 만리장성 등은 지리상 위치를 밝히기 위해 최근 넣은 것으로 당시에는 이런 글자는 지도에 담겨있지 않았다.

[아시아엔=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방송문화진흥회 전 이사] 일본도 잇따른 중국의 굴욕적 패배를 목도하며 막부(幕府)체제를 종식시키고 메이지유신체제를 만들었다. 이를 발판으로 근대화와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제국의회(1890) 건설 등 입헌민주체제로 나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백성과 신민을 넘어선 균등한 근대시민(市民)을 전제로 하는 민족 자각은 민족국가 건설은 물론, 봉건체제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자각으로 주권독립의 기반을 만든 것이다. 항일(抗日)적 차원을 넘어, 백성적 존재를 넘어서고 피지배 민족을 넘어선 민족의식이었기에 당연히 봉건왕조체제의 복귀나 식민지배가 아닌 민주적 통치질서를 만들겠다는 근대국가를 향한 거대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두번째로 3.1운동에서 보여진 독립지향 과정에 나타난 커다란 진전은 바로 중국 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해냈다는 것이다. 봉건 조선의 세계관에는 천하(天下)의 구성은 항상 중국과 주변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도 없던 세계관이었다. 중국은 곧 전체라는 의미의 천하관(天下觀)이었고, 천하를 통치하는 정점에는 천자(天子)인 황제(皇帝)가 있다는 지배적 질서체계를 유지해왔기에 근대적 주권국가체제를 지향하기 어려웠다.

지도의 예를 보더라도 조선에서 작성된 대표적 지도인 15세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혹은 18세기 ‘천하여지도’는 모두 중심의 중국과 그 주변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세계관에 따라 심지어 정조시대조차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를 방문하고 세계변화와 문물도래와 관련하여 쓴 여행기인 <열하일기>(熱河日記)까지 금서가 되어 함부로 읽지 못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3.1운동을 보면 민족 자각과 함께 일본 식민체제로부터의 독립을 구하면서도 일체 중국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것은 백성을 넘어선 인식과 함께 3.1운동에 나타난 커다란 세계관의 변화였고, 명백하게 근대 주권국가체제에 대한 인식으로의 전환이었다. 중국을 중심에 놓고 조선이 조공과 책봉에 따라 주어진 변방으로 여기는 세계관적 사고는 3.1운동을 거치면서 대중적 차원에서 확고하게 극복해냈다.

5백년에 걸친 중국의 속방적 성격을 넘어 ‘대한제국’에 이어 ‘대한민국’을 지향하며 일본에 대항하고 중국을 거론하거나 의존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문명사적 전환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영향은 청일전쟁(1894-5)에서의 청나라 패배가 보여준 조선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영국 및 서구는 물론 일본에 대한 청의 패배는 일본으로부터 벗어난다 하더라도 돌아갈 종주국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화질서로부터 근대 주권국가체제를 만든 첫 계기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만들어진 구조의 산물이기도 하다. 강화조약의 제1조가 “조선은 독립국임을 확인한다”는 것에서 보듯 비록 또 다른 일본제국주의의 시작이기도 했지만 시모노세키조약은 동아시아에서 유럽의 주권국가 체제를 만드는 것과 유사성을 띄었다.

황제가 다스리는 천하가 있고 변방과 속방에 불과했던 일본이 황제국을 패배시키고 대등한 조약을 맺고 속방에 해당하던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청일합의가 그것이다. 또 다른 제국주의 질서가 목적이었지만 청일전쟁의 결과는 봉건 조선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고 청의 일방적 지배로부터 조선이 독립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시모노세키조약의 조선 독립은 한민족 스스로 원했던 것도 아니고, 스스로 싸워서 얻은 것도 아니었던 주권국가 지향이었지만, 3.1운동은 우리 민족 스스로의 열망과 요구에 의해 근대주권국가를 지향하는 민족적 분출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3.1운동 전 일본에서 발표되어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2.8 독립선언서’에는 명백하게 조선이란 명칭 대신 ‘한국’(韓國)이란 국가개념의 호칭과 우리 민족이란 의미의 ‘오족’(吾族)이란 표현이 수십 차례 반복되어 나타난다. 세계의 각 민족국가처럼 우리 영토 내에 우리 민족이 있으며, 우리 민족은 일본과 다르고 차별을 넘어 스스로 문명적 독립된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음을 밝혔다.

또한 “…오족에게는 대소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 기지에 종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불소(不少)히 구속하며 생정, 사법, 경찰 등 제 기관이 조선민족의 인권을 침해하며 공사에 오족과 일보인간에 열등의 차별을 허하여…,”란 내용에서 보듯 인권침해와 자유의 구속에 대한 거부 등 근대 민주주의적 기본요소와 제도를 구현하겠다는 내용이 확고히 반영되어 있다.

물론 3.1독립선언서나 3.1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1독립선언서에 나타난 것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발양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따른 민족의 희생과 함께 손상된 민족의 존엄과 명예를 찾고 세계에 이바지하는 나라로 우뚝 설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권리를 누리고 자유를 구현하고자 함을 밝히는 것에서 보듯 자유를 구현하기 위한 독립국가의 지향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렇기에 3.1운동은 구한말 근대 개화를 계승하며 개인의 자유 실현을 위한 독립국가 지향이란 점에서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일본 지배의 거부는 물론이고, 중화 질서의 종식, 봉건 왕조질서의 폐기와 함께 주권국가를 구현하기 위한 각종 정부(government)수립 운동으로 나아간 것이 바로 3.1운동이 갖는 의의였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차별성과 낙후성에 대한 극복과 독립정부의 구성,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 위상의 제고와 민족 번영의 지향이라는 차원에서 발전주의로 나아 가게 되었고, 그것은 건국과 6.25전쟁을 끝내며 본격적으로 따라잡기(catch-up)적 산업화로 번영 민족주의로 전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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