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5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취임

2003년 후진타오 중국 주석 취임

2003년 3월15일 후진타오(胡錦濤, H? J?nt?o, 1942년 12월21일)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취임했다.

후진타오는 칭화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아 혁명의 광풍에 휘말리지 않았다. 대학교 졸업 이후 수력발전소에서 노동자로 근무를 시작해 기술관료가 됐고 정치인 생활을 통해 중국 최고권력자가 됐다.

마오쩌둥은 앞서 국가 주석직과 당수직, 군권을 각각 분할했다. 이에 따라 후진타오는 우선 2002년 장쩌민으로부터 당 총서기직을 넘겨받아 당권을 장악했다. 이어 2004년 9월에는 국가주석직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각각 넘겨받아 정권과 당권, 군권을 모두 장악한 상태다.

후진타오는 중국 내 자본가들을 대거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이 때문에 그에게 ‘붉은 자본가’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대형 국책사업을 통한 통치권 수립에도 관심을 쏟았다. 제2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던 천산 고속도로 공사가 대표적이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지는 지난 2010년 11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제치고 후진타오를 ‘세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로 선정했다.

1960년 한국 이승만 정권 대대적인 부정선거

1960년 3월15일 한국에서는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당시 집권 자유당 정권은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집권 자유당은 정·부통령 후보에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이기붕, 민주당에서 조병옥과 장면이 각각 출마했다. 그런데 선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치료받던 중 급사했다.

▲마산시위에서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학생이 1960년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체로 발견됐다.

그 뒤 이어진 자유당의 관권 선거운동은 노골적이었다. 경찰과 공무원을 선거에 동원했고 군소 정당 후보들은 입후보 등록서류를 빼앗겼다. 반공청년단, 정치깡패들은 유세장에서 야당 후보를 협박했다. 선거당일엔 40%나 되는 이승만측 찬성표가 미리 투표함에 담겨져 있었다. 몇 명씩 조를 짜 조장이 기표를 확인토록 해 이탈표를 막았다. 정치깡패들은 투표소에서 투표함을 바꿔치기 했다. 무더기 찬성표를 집어넣기도 했다.

마산에서 야당 당원들이 미리 기표된 투표함을 발견했다. 시민들은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들어갔다. 이날 밤늦게까지 진행된 시위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승만 후보측 득표율이 95%를 넘어섰다. 자유당은 당황해 득표율을 낮춰 발표했다. 그렇게 수정 발표된 득표율은 이승만-이기붕 후보 각각 88.7%와 79%였다.

마산시위에서 행방불명됐던 김주열 학생이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처참한 시체로 발견됐다. 3·15부정선거 결과 선거부정은 데모를 유발해 유혈사태를 빚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4·19혁명과 자유당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1988년 신(新) 베오그라드 선언

1988년 3월15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1931년 출생) 옛 소련 공산당서기장이 유고슬라비아 방문, 모이소프 유고슬라비아 연방간부회의 의장과 공동으로 ‘신 베오그라드 선언’을 발표했다. 양국 공산당의 독자노선을 인정하는 선언을 채택한 것이다.

“아무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 발전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게 선언의 뼈대다. 이 선언에 따라 1968년 ‘프라하의 봄’ 탄압에서부터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까지 이론적 근거가 됐던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1906~1982) 전 서기장의 이른 바 ‘제한주권론’이 공식 폐기됐다. 자국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된 옛 소련 우방국들과 동구권은 다양한 모델로 발전했다. 일부 문헌에는 선언일이 1988년 3월18일로 기록돼 있다.

1951년 이란 석유국유화 법안 의회 통과

▲ 1951년 당시 이란 국민전선 지도자 무하마드 모사테크(Mohammad Mosaddegh, 1882년 6월16일~1967년 3월5일)가 이란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1951년 3월15일 이란의 석유산업 국유화 법안이 상원과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자 이 나라 국민전선을 이끌던 정치인 무사데크는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란의회는 당시 이란의 석유를 독점지배하고 있는 영국자본의 앵글로·이란석유회사(AIOC)에 대한 국유화 법안을 가결했다. 당시 70세 노구를 이끌고 법안을 통과시킨 무사데크는 석유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됐다. 팔레비 당시 이란 국왕은 국민전선의 압력으로 무사데크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석유 국유화 법안에 서명했다. AIOC의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석유 국유화를 반겼다.

약 일주일 전인 3월7일 “외국의 지원 없이 석유 국유화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온 알리 라즈마라 당시 수상은 이 무렵 광신적인 이슬람교도에게 암살됐다. 무사데크가 석유 국유화에 이어 이란국영석유회사(NIOC)를 설립하자 영국은 “이란산 석유판매를 방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고 발표했다. 국제석유자본도 영국에 화답, 이란 석유의 취급을 거부하자, 석유수입에 크게 의존해 온 이란경제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외화가 부족해지고 수입이 감소하자 국민들 사이에는 반(反)무사덱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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