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4일] 공산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 영면하다
2011 한국 시인 고은, 일 지진 피해 희생자 애도
2011년 3월14일 한국의 시인 고은은 당시 지진과 원전 폭발로 희생된 수십 만 일본인들의 넋을 기리는 시 <일본에의 예의>를 한국의 일간지 한겨레신문에 기고했다.
시인은 “몇 만일지 모를 일상의 착한 목숨들 이제 살아오지 못한다”는 말로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그러나 일본은 새삼 아름답다/ 결코 이 불행의 극한에 침몰하지 않고/범죄도/사재기도/혼란도 없이/너를 나로/나를 너로 하여/이 극한을 견디어내고 기어이 이겨낸다”면서 침착하되 서로를 배려하는 자세로 재앙에 맞서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아울러 “인류는 인류의 불행으로 자신을 깨닫는다”는 시구를 통해 원자력 등 인류문명의 잠재적 위험성을 경고했다.
일본에의 예의
어떻게 저 무지막지한 재앙에
입 벌려
빈 소리를 낸단 말인가
어떻게 저 눈앞 캄캄한 파국에
입 다물고
고개 돌린단 말인가
이도 저도 아닌 속수무책으로 실시간의 화면을 본다
몇 천일지
몇 만일지 모를 일상의 착한 목숨들
이제 살아오지 못한다
어머니도
아기도
할아버지도 휩쓸려갔다
아버지도
누나도 친구들도 어느 시궁창 더미에 파묻혔다
그리도 알뜰한 당신들의 집
다 떠내려갔다
배들이 뭍으로 와 뒤집혔고
차들이 장난감으로 떠내려갔다 우유도 물도 없다
인간의 안락이란 얼마나 불운인가
인간의 문명이란 얼마나 무명인가
인간의 장소란 얼마나 허망한가
저 탕산 저 인도네시아
저 아이티
저 뉴질랜드
오늘 다시 일본의 사변에서
인류는 인류의 불행으로 자신을 깨닫는다
그러나 일본은 새삼 아름답다
결코 이 불행의 극한에 침몰하지 않고
범죄도
사재기도
혼란도 없이
너를 나로
나를 너로 하여
이 극한을 견디어내고 기어이 이겨낸다
오늘의 일본은
다시 내일의 일본이다
내 이웃 일본의 고통이여 고통 그 다음이여
오늘의 일본으로
이후의 일본 반드시 세워지이다
<시인 고은>
1883년 칼 마르크스 사망한 날
1883년 3월14일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이념적 씨앗을 정초한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런던 자택에서 기관지염과 감기 등으로 사망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장례식장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생각하기를 멈췄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평온한 얼굴로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지구촌 인류에 진보와 혁명 사상을 남긴 위대한 사상가의 장례식은 조촐했다. 가족과 공산주의 지도자 등 10여 명만이 참석했다. 그의 무덤은 런던 북부 하이게이트 묘지에 있다. 거대한 흉상 아래에는 마르크스의 저서 <포이에르 바흐에 관한 테제>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다.”
1818년 5월5일 마르크스는 독일 트리에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본 대학 법학부에 등록했지만 역사와 철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4살 연상의 귀족 가문의 딸 예니 폰 발레스타인을 만나 결혼했다.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마르크스는 젊은 헤겔주의자들과 교류하며 헤겔 변증법에 흥미를 갖게 된다. 그의 철학 박사 학위논문 제목은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투스의 자연철학>이었다. <라이니셰 자이퉁>지에 정치 평론을 쓰면서 정치 기고가의 생활을 시작했고, 체제 비판적인 그의 글과 급진적인 매체는 그의 러시아 군주제 비판 글을 계기로 폐간됐다. 프랑스 파리에서 그가 참여한 <독일-프랑스 아날>지 역시 첫 호가 마지막 호가 됐다.
그의 평생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난 것은 1844년 8월 파리의 한 카페에서였다. 엥겔스 역시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 등을 통해 자본주의 비판에 선두에 섰던 사상가였다. 엥겔스는 40여년에 걸쳐 마르크스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런 엥겔스의 지원에 힘입어 마르크스는 1848년 2월 유럽 공산주의 운동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마르크스는 이듬해인 1849년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다. 극심한 가난에 아랑곳 하지 않고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자본론>집필에 착수한다. 그 1권은 1867년 출판됐다. 그 뒤 15년에 걸쳐 <자본론> 2·3권을 써냈지만, 두 권은 그의 생전에는 볕을 보지 못했다.
2008년 에스트라다 필리핀 전 대통령 영화배우 복귀
‘2008년 3월14일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필리핀 대통령이 영화계 복귀를 선언했다. 2007년말 종신형을 사면 받은 지 4개월만의 일이었다.
전직 영화배우 에스트라다는 이날 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오는 5월 마지막 영화에 출연할 예정이며 부패 스캔들에 휩싸여 있는 아로요 대통령의 축출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에스트라다는 대통령이 되기 전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 주로 가난한 서민 역을 맡아 인기를 모았다.
1998년 대통령에 당선된 에스트라다는 3년 만인 2001년 군부가 주축이 된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2007년 9월 부정축재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으나 다시는 정치활동을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의 사면을 받아 석방됐다. 그러나 엄청난 재산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는 에스트라다는 약속을 어겼다. 당시 부패 추문에 시달렸던 아로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에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과 함께 적극 참여했던 것. 정적에게 호혜를 베푼 아로요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그는 2010년 대선에 다시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그의 아들 조지프 에스트라다 2세가 상원의원에 당선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