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폴리스] ‘성폭행사건’에 대한 오해와 진실
[아시아엔=김중겸 전 인터폴 부총재, 경찰청 전 수사국장] 성폭행(sexual violence)은 일생동안에 여성 5명 중 1명이 경험한다. 남성은 71명 중 1명. 이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사건 해결보다는 피해자의 자책감+수치심+죄책감만 자극하는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① 아는 이한테 당하지 않았느냐
인적 드문, 어두운 골목에서 여성이 습격당하는 장면이 미디어에 자주 나온다. 가공의 이야기다. 실제로는 상당수가 집에서, 잘 아는 사람에게 당한다. 잘 모르는 낯선이는 10%에 불과하다.
56%는 피해자의 파트너, 33%는 가족·친구·지인이다. 그러니 너의 부주의다. 누굴 탓 하냐고 2중의 피해를 입는다.
살인의 경우도 유사하다. 2017년 여성 피살자는 8만7천 명. 가해자는 파트너 3만명(34%), 가족 2만명(23%)이며 이 둘을 합치면 5만명(57%)에 이른다.
전혀 모르는 제3자가 3만7천명(43%)이다.(유엔 마약 및 범죄 사무국 UNODC 2018년 11월 26일 자료)
② 왜 신고하지 않느냐
영국 내무부 신고상황 조사에 의하면 당일신고 46%, 6개월 이후 14%다. 나머지 40%는? 아예 신고하지 않는다. 미국의 미신고는 66%나 된다.
16세 이하의 당일신고는 28%, 6개월 훨씬 지나서는 33%. 신고하지 않거나 신고를 늦게 하는 피해자는? 가해자가 연인이거나 가족이다. 차마 교도소 보내지 못한다. 정(情)이 원수다.
가해자가 경제권 쥐고 있는 경우는 더 신고 안한다. 아니, 할 수가 없다. 너 때문에 교도소 들어왔는데 생활비 대달라고? 대줄 리 없다. 피해자는 생활고에 시달린다.
③ 신고하면 다 잡히나
신고가 빠르면 빠를수록 범죄감식이 손쉽고 정확해진다. 피해자의 몸에 묻어 있는 정자, 침이나 땀, 머리카락, 유전자 채취가 가능하다. 그뿐 아니다. 찰과상, 타박상, 벤 상처도 가려낸다.
그렇다 하더라도 체포와 유죄로 이어지기는 굉장히 어렵다. 증거가 특정 가해자를 지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인간!’ 밝혀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번번이 풀려난다.
미국은 신고건수의 18%만이 체포된다. 유죄는 2%에 그친다. 영국은 당일 신고건수의 26%가 유죄가 된다. 하루 이틀 신고가 늦어지면 14%로 떨어진다.
④ 원하지 않았다면 저항했어야
범죄 대처방법은 다양하다. 누구는 강하게 반항한다. 어떤 이는 말로 설득한다. 육체가 침범당하면서도 정서적으로는 체념하는 이도 있다.
미국 성범죄 수사조서에 의하면 22%가 고함 치고 때리고 반격해서 밀쳐내려고 했다. 56%는 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22%는 무서워서 얼어붙었다. 피해자가 반격하면 피해를 회피할 확률은 높아진다. 동시에 더 심한 폭행과 살인으로 이어진다.
가해자는 제압하려고 무지막지한 폭력을 사용한다. 이미 피해자에게 얼굴이 알려진 상태다. 체포를 피하려고 때로는 죽이기도 한다.
설득하거나 울면서 애원하면 어떤가.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판단한다. 범행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을 에스컬레이트 한다. 그런데도 저항하라고? 무저항은 강간을 받아들인 행위라고 몰아 부친다. 당한 건 네 탓이다!
⑤ 당하고서도 기억해내지 못하다니
기억은 종합현상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는 각 행위가 모여서 하나의 기억이 된다. 일상생활에서는 각 요소가 뇌에서 잘 통합된다. 하지만 절박한 상황에서는 단절된다. 소리는 기억난다. 모습은 기억 안 난다. 단편적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강간은 극한상황이다. 기억력이 작동되지 않는다. 희미하게, 어렴풋이 기억한다. 게다가 ‘무서운 경험=공포’는 잊으려고 한다. 기억상실 즉 망각으로 이어진다.
형사가 “몇시였느냐?”고 물으면 “그게···. 글쎄” 정확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시간과 장소와 상황의 정확한 진술이 필요한데 이게 애매모호하다. 답변이 모순되기도 한다. 왜 거짓말하느냐. 피해자를 비난하게 된다.
게다가 후유증이 기억을 방해한다. 신체적 후유증 즉 신체부위가 훼손된다. 질병이 전염되거나 발생한다. 임신도 큰 문제다. 심리적 후유증으로는 자신을 탓하고(self-blame) 자학한다. 자살하기도 한다.
사회적 후유증은 경찰 사법기관에서 1차 피해를 재생시키는 2차 피해를 당한다. 주위로부터 피해자를 비난하는(victim blaming) 소리를 듣는다.
이러한 현상들이 무기력하게 만든다. 잊고 싶고 숨고 싶은 심정은 기억재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신이 없어진다. 잘 모르겠다는 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