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나으리, 국민들 은혜 모르면 금수와 다를 바 뭐 있겠소?”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을 선출해준 국민들 뜻을 헤아려 이를 실천하는 게 뭣보다 중요한 덕목이다. 사진은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국회의원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지은보은’(知恩報恩)이라는 말이 있다. 남에게 입은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은혜 입기는 좋아하되 은혜 베풀기는 게을리 하는 경향이 많다. 입은 은혜는 잘 잊어버리되 베푼 은혜는 잊어버리지 아니한다. 또 은혜 베푼 후에 상대가 갚지 아니하면 원망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하여 원망이 원망을 낳고 은혜에서도 원망을 낳아 배은망덕(背恩忘德) 하는 일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와 같이 피차가 원망과 배은으로 얽히고 섥혀서 속담에 말하는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의 화(禍)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 사상과 사상 사이에 모두 이러한 관계로만 이어간다면, 역사의 방향은 과연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며, 인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원불교에서는 종래의 윤리 즉, 소극적인 인간 중심의 윤리나 어떤 절대자와의 관계설정을 윤리로 규정하려는 의도를 지양(止揚)한다. 그 대신 네 가지 큰 은혜, 즉 ‘천지·부모·동포·법률’을 은혜의 덩치로 가르친다. 이를 통해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릴 수 있다.

우리가 어떠한 물건을 막론하고 좋지 않은 것만을 발견하여 버리기로 하면 한 사람 한 물건도 유익하게 쓰일 곳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안 좋은 사람이요, 양잿물과 같이 독한 물질이라도 쓸 곳을 발견하고 좋은 것을 가려서 쓰기로 하면 한 사람 한 물건도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유익한 은혜만을 발견하여 활용하는 보은을 한다면, 천지도 부모도 동포도 법률도 물건도 사상도 모두 자비로운 보살로 화현(化現)될 것이다. 그 은혜를 갚는 ‘노인과 갈매기’ 얘기가 있어 전해드린다.

미국 보스턴 해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날마다 일정한 시간이면 머리가 하얀 백발노인이 통에 가득 싱싱한 새우를 가지고 나와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에게 먹이는 것이다. 갈매기들은 이 노인을 알아보고 으레 그 시간이 되면 해안에 모여서 노인이 주는 새우를 맛있게 받아먹는다.

하지만 아무도 그 노인이 싱싱한 새우를 왜 갈매기들에게 매일 같이 먹이는지 물어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없는 어린아이 하나가 그 이유를 물었다. “할아버지, 이 싱싱한 새우를 왜 매일같이 저 갈매기들에게 먹이는 거예요?” 노인은 어린아이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2차대전 때 미군 함정의 함장이었단다. 그런데 내가 탄 배가 일본군들이 쏜 어뢰에 맞아서 그만 격침되고 말았지. 많은 부하들이 죽고, 나와 몇몇 사람만이 구명보트를 타고 간신히 살아남았어. 햇볕은 뜨겁고 식량은 다 떨어져서 거기에 남은 사람들마저도 하나둘 죽어가는 형편이었단다. 나 역시 너무나 힘들어서 정신이 몽롱해졌어.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눈을 떠보니 어깨에 갈매기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더구나. 쫓으려고 했지만 영 도망도 가지 않았어. 그런데 못 견딜 정도로 배가 고파서 할 수 없이 그 갈매기를 잡아먹고 기운을 차려서 마침내 살아남았단다. 그래서 나는 갈매기를 볼 때마다 그때 갈매기의 은혜에 감사하지. 내가 잡아먹은 그 갈매기를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너무도 고마웠던 그 때의 기억으로 인해 이렇게 새우를 사다가 먹이고 있는 것이란다.”

옛날 우리 글에 착한 사람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은 마치 ‘지란지실’(芝蘭之室)에 들어간 것과 같다 하는 말이 있다. 지란은 난초를 의미한다. 좋은 향기가 나는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면 온 방안이 향기로 가득해서 자연히 향기에 도취된다.

필자는 개를 기르지 않는다. 이별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적 고향집에서 ‘도꾸’라는 개를 길렀다. 언제나 나만 따르는 충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니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앉아 바로 우리 ‘도꾸’를 잡아먹자는 공론을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즉각 ‘도꾸’를 데리고 도망을 쳤다. 그런데 이 ‘도꾸’를 때리며 도망가라고 해도 꼬리를 흔들며 내 주위를 맴돈다. 그러다가 그만 어른들에게 잡혀 미류 나무에 목이 매달려 결국 보신탕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는 평생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

은혜를 입고 갚지 않는 자는 짐승만도 못한 저급한 인간이다. 짐승은 주인을 알고 어떤 경우에도 그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주인을 배반하고 배은망덕을 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사람이 서로 사귀는데 그 좋은 인연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대개 유념(有念)할 자리에 유념하지 못하고, 무념(無念)할 자리에 무념하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유념할 자리에 유념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방면으로든지 남에게 은혜를 입고도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념할 자리에 무념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방면으로든지 남에게 은혜를 베푼 후에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은혜 입은 사람이 혹 나에게 잘못하면 전날 은혜 입혔다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미워한다. 그래서 좋은 인연이 오래가지 못하고 원수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이치를 잘 알아서 유념할 일에는 반드시 유념하고, 무념할 자리에는 무념하는 지은보은의 이치를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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