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공금유용 폭로 박용진 의원과 정약용 그리고 ‘청백리’ 한익상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지난주는 사립유치원들이 공금을 유용했다는 소식이 온통 들끓었다. 공금유용은 국가나 공공단체의 운영을 위하여 마련한 자금을 개인이 사사로이 돌려쓰는 일을 말한다.
10월 11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3~2017년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감사에서 1878개 사립유치원이 5951건의 비리가 적발됐다고 발표하였다. 비리 행태를 보면 △개인용도의 카드결제 △자동차세납부 △성인용품 구매 등 비리란 비리는 다 하고 지내온 듯하다.
적발 규모는 물론 상식을 뛰어 넘는 심각한 비리백태에 교육기관의 도덕적 책무를 저버렸다는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더군다나 감사 결과에 불복해 처분이 완료되지 않았거나 소송이 진행 중인 건은 명단에 포함되지도 않은 수치라고 한다.
전국에 약 4200여개의 사립유치원이 있는데, 이번에는 1878 개의 유치원만 자료를 받아 발표했다고 한다. 전체의 1/4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치원에서 90% 이상의 비리유치원이 있다면 나머지 조사발표에는 어떨지 가히 짐작이 간다.
왜 이런 행태가 계속 반복되었을까?
첫째, 회계시스템 문제다. 사립유치원의 회계방식은 원장이 직접 회계업무를 병행하는 곳이 절반 정도라고 한다. 당연히 객관적인 회계관리가 어렵고, 적발되더라도 업무 미숙이라는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관행을 묵인하기에는 사립유치원에 지원되는 예산은 매년 2조원 이상으로 막대하다. 유치원 한곳 당 5억원에 가까운 금액인데 아직까지 제대로 된 회계시스템조차 마련되지 않고 유치원 원장들이 제출하는 서류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더욱 문제다.
둘째, 정치적인 이유다. 전국 사립유치원 운영자와 원장들의 협의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는 교육기관이 관리·감독을 강화하려 할 때마다 막강한 지역사회 영향력 등을 바탕으로 극렬히 저항해왔다. 실제 지난 5일 국회에서 열린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를 막으려고 현장에서 집단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사립유치원 통제나 감사를 강화할 때마다 국회와 교육부, 시·도 교육감 등을 상대로 줄기차게 로비를 벌인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필자는 젊은 시절 개인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국가의 지원금을 받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원불교 귀의(歸依) 이후 원불교 여러 단체에 책임을 맡고 공금을 써오던 때가 었다. 그때에도 공금을 내 손으로 집행해 본 적이 없다. 회계책임자에게 맡기고 그 대신 감독을 철저히 해왔다.
공금과 사금을 구분할 줄 알아야 참 종교인이다. 원불교 30계문(戒文) 중 보통급 십 계문에 “공금을 범하여 쓰지 말며”는 조항이 있다. 그리고 원불교 <대종경>(大宗經) ‘교단품 38장’에서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 일반 교무에게 훈시하신 말씀이 나옵온. “교화선상에 나선 사람은 물질을 주고받는 데에 청렴하며, 공금 회계를 분명하고 신속하게 할 것이요”라고 공금과 사금을 구분할 것을 지시한다.
모름지기 종교인이나 교육자라면, 공사간의 경계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아무리 소액이라고 해도 조금 귀찮다는 이유로 공금과 사금 통장을 하나로 해서 헷갈리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면 이것은 참 교욱자나 종교인이 아니다.
정약용은 평생의 목표로 ‘공렴’(公廉)이라는 대원칙을 삼았다. 다산은 공정하고 공평한 공무집행에 청렴이라는 도덕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때만 목민관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산은 청렴한 목민관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의 친구 한익상(韓益相, 1767∼1846)은 가난한 선비다. 벼슬살이로 수십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다. 만년에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자, 친구들이 모두 그의 살림이 좀 윤택해질 것을 기뻐했다. 그런데 경성부에 부임해서도 한결같이 청렴결백하고 녹봉 5만∼6만전을 희사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하고 부역(賦役)을 감해주었다. 하찮은 일로 파면되어 돌아올 적에 관내 백성 5천호(戶)의 부로(夫老)들이 교외에 나와 전송을 해주고, 호마다 베 1필씩을 거두어 그에게 노자로 주었으나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돌아와 집안을 살펴보니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은 지가 사흘이나 되었어도 끝내 후회하는 일이 없었다.”
한익상은 순조 7년(1807) 문과에 급제하여 낮은 벼슬에 전전하였기에 가난은 언제나 면할 길이 없었으나 후회하지 않고 탁월하게 청렴한 공직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가난했지만 한익상은 녹봉까지도 더 가난한 백성들에게 희사했으며 그 결과 임무를 마치고 떠나오던 날, 집집마다 주민들이 나와 환송해 줄 정도로 현명한 목민관 생활을 했다. 그러니 다산이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공금을 유용한 죄는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는다 했다. 공직자들은 청렴할 때에만 백성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집안에 식량이 떨어졌어도 전별금까지 사양했던 한익상 같은 목민관이 오늘에도 있다면 얼마나 세상이 좋아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