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2일] 폭탄, 폭동, 시위…인도 사람들 일진 나쁜 날

2009년 미 하원, ‘파이데이’ 지정 결의

2009년 3월14일 미국 하원은 이날을 ‘파이데이’로 공식 지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의원들은 미 국립과학재단(NSF)의 수학교육개선 노력을 촉진하기 위해 파이데이 결의안을 찬성 391표 대 반대 10표로 통과시켰다. 낸시 펠로시 당시 미 하원 의장은 그동안 과학기술 증진을 위해 의회가 힘써줄 것을 촉구해왔으며, 펠로시 의장의 고향인 샌프란시스코 과학관은 지난 1988년 처음으로 파이데이 축하 행사를 열기도 했다.

3월14일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생일이며 3.14는 원주율 파이(π)의 값이다. 세계 수학계는 프랑스 수학자 자르투가 세계 최초로 원 둘레와 지름간의 길이 비율인 원주율 3.14를 고안한 것을 기념해 이날을 ‘파이의 날’ 또는 ‘원주율의 날’로 정하고 다양한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매년 3월 14일 1시 59분에 원주율 탄생 축하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고등과학원에서도 이날을 기념, 원주율 ‘3.1415926535897…’을 모티브로 해 14일 1시 59분에 다양한 파이데이 행사를 연다.

2008년 중국 혁명음악 대부 한국 모교서 명예졸업장

2008년 3월12일 중국 혁명 음악의 대부인 고 정율성(1914~1976) 선생이 모교인 전북 전주신흥중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전주신흥중은 이날 학교를 방문한 정 선생의 외손자 지엔펑(劍峰) 세천문화유한공사 총경리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광주에서 태어난 정율성 선생은 중국 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 행진곡>, 중국의 아리랑 격인 <옌안송> 등 360여곡을 남겼다.

그는 <중국 국가>의 작곡가인 녜얼, <황하 대합창>의 작곡가 셴싱하이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음악가로 불리고 있다.

숭일학교를 마친 그는 1929년 신흥중학교에 입학해 악보와 만도린을 배우고 브나로드(민중속으로)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1932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학교를 그만두고 이듬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1993년 폭탄테러, 폭동, 시위…인도 사람들 싸운 날

1993년 3월12일 인도 뭄바이에서 폭탄이 연쇄적으로 폭발 200여명 사망하고 1100명이 부상했다.

1966년 3월12일에는 인도 전역에서 식량폭동이 발생했다. 최초 항구도시 캘커타에서 발생한 폭동에서 시위 군중들은 기차를 막고 불을 질렀다. 화재 진압을 위해 현장에 출동한 소방차까지 불길에 휩싸였다. 식량폭동 결과 20여 명이 숨지고 수천 명이 다쳤다.

폭동 두달 전 취임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각 정파 간 협조를 요청했다. 군대와 경찰의 출동으로 소요사태는 진압됐지만 인도 국민들은 큰 후유증을 앓았다.

1930년 3월12일 마하트마 간디는 당시 영국이 소금에 대해 매긴 세금에 항의, 소금행진을 시작했다. 소금 사티아그라하 또는 소금 행진은 영국 식민지 하의 인도에서 소금세 폐지를 주장하며 일어난 사티아그라하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이끈 행진대는 사바르마티 아쉬람에서 구자라트 주의 단디까지 행진했다. 행진은 4월6일까지 한달 가까이 진행됐다.

1925년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 사망

1925년 3월2일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 1866년11월12일 출생)이 서거했다. 59세. 2011년은 중국이 1911년 10월10일 신해혁명을 통해 청 왕조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한 지 꼭 100년 되는 해였다. 혁명의 중심에는 민족·민권·민생을 3대 원칙으로 하는 삼민주의(三民主義)정신이 있었고, 그 이념의 토대를 만든 사람은 바로 쑨원이다.

쑨원은 1866년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지금의 中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때 형을 따라 하와이로 유학, 일찍이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된다. 귀국 후 26세에 의사가 됐지만 평범한 의사로 살아갈 순 없었다. 청나라 말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취급을 받던 중국 상황은 그에게는 너무도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는 혁명운동의 현장에서 몸으로 정치를 배워갔다. 29세 나이로 첫 무장봉기를 감행했지만 실패로 끝나면서 긴 해외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미국, 일본, 영국을 떠돌며 ‘태평천국’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고, 서구 국민주권설과 사회계약설 등을 중국 현실에 접목시킨 삼민주의를 완성한다. 그에게 삼민주의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정치·경제적 평등을 인정받으며 영원한 독립국가로 생존할 수 있는 방편이었고 위기의 조국을 구출하기 위한 구국주의였다.

1924년 5월 연설에서 쑨원은 “중국은 수천년간 1등 강국이었다. 하지만 최근 100년간 잠들어 있었다. 중국인이여, 이제 깨어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간암 진단으로 병상에 눕게 된 그는 “혁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듬해 숨을 거뒀다.

그의 묘인 중산릉은 “이곳에 들르지 않으면 중국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지만 너무 크고 화려하게 꾸민 탓에 평생을 절대왕조와 싸운 혁명가의 무덤이 황제의 능을 모방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또 혁명동지들에게 개인적 충성서약을 강요하고 전처와 이혼도 하지 않은 채 여비서와 결혼함으로써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쑨원은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비록 대만에는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중국 본토에서는 ‘오성홍기’가 제각각 휘날리고 있지만 그는 중국의 ‘궈푸(國父)’로 최고 예우를 받고 있다.

1832년 보이콧의 어원 제공한 사람 태어난 날

1832년 3월12일 영국 노퍽에서 찰스 보이콧(1832~1897)이라는 사람이 태어났다. 어떤 일을 계기로 그의 이름은 나중에 “자신들의 이익이나 입장을 지키기 위해 ‘공동으로 거절하고 거부하는’ 사건”을 의미하는 ‘보이콧'(boycott)’으로 굳어져 버린다. 그리고 지구촌은 그의 이름을 그런 의미로 매일매일 쓰고 있다.

보이콧은 어릴 때부터 평범했다. 왕립사관학교에 들어갔다가 성적부진으로 쫒겨났지만 우여곡절끝에 육군 장교가 돼 식민지인 아일랜드에 주둔했다. 대위로 제대한 뒤 그곳에서 언 백작의 영지 관리인으로 일했다.

1880년 흉작으로 아일랜드 토지동맹이 소작료 25% 삭감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폭력을 쓰지 않는 대신 그와 어떠한 접촉도 하지 말자는 운동을 벌였다. 이웃들은 말조차 걸지 않았고 가게들은 물건을 팔지 않았다. 아일랜드 사람들로부터 조직적으로 ‘왕따’를 당한 그는 그 해 말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이 사건이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그의 이름 ‘보이콧’은 보통 명사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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