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서울올림픽 성공의 주역 박세직 조직위원장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88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을 건국해 수호하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모든 성취가 종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박세직 장군은 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 이를 유감없이 성취해냈다. 박세직은 무엇이든지 배우는 것에 열심이었다. 매년 정구, 골프, 댄스 등 하나씩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마스터해나갔다. 박세직은 하나회 멤버로서, 3사단장을 거쳐 수경사령관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중도 하차했다. 박세직의 재능을 아쉬워 한 전두환은 그를 국가적 사업에 활용하기로 하고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겼다. 박세직은 오명 박사, 강동석 사장과 같이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낸 사람이다.
박세직은 모든 일에 정열이 대단했다. 사단장 시절 모토가 ‘자즐보’였다. 일을 할 때에는 ‘자랑스럽게, 즐겁게, 보람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3사단장 사절 전방 철책공사를 완수했는데 김일성이 장교 군번 세 트럭하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천험天險의 오성산과 상대하고 있는 가장 험난한 지역이다. 그때의 작업 여건은 지금처럼 차로 올라가지 못하고 병사들이 시멘트 한포 한포를 모두 등으로 날랐다. 지금도 출력이 좋은 험비로 올라가지 보통 지프차로는 올라가기 힘들 정도다. 박세직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했다. 3사단장만이 아니라 당시 군은 모두 그랬다.
박세직은 육사에서 영어 교관을 지냈다. 영어는 물론, 불어와 독일어 실력도 상당했는데 당시부터 이미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었다고 동기생은 말한다. 올림픽조직위원장은 일일이 통역을 통해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박세직 조직위원장은 IOC 사마린치와는 스페인어로 통했고, 아프리카 선수 및 임원과는 영어, 불어로 통했다. 박세직의 닦아진 어학실력이 빛을 보았다.
강경화 외교장관이 부친 강창선 아나운서 덕분에 일찍부터 미국에서 공부해서 영어는 잘 한다지만, 유엔총회에서 인사말 이상의 불어,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는가?
필자는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시기에 마침 영국에 있었다. 개회식을 TV중계를 통해 바라보는 영국 사람에게는 찬탄의 연속이었다. 대영제국을 경영했던 영국인은 의전과 행사에 특출하다. 여왕의 생신 축하 분열식에는 외교관들도 자리 하나 얻기 위해 줄을 선다. 그들은 6·25전쟁에 참전도 했지만 그때까지 한국은 미국과 연관되어서 보고 있었다. 영국만이 아니었다. 온 유럽이 마찬가지다.
소련이 종막을 고하는데 서울올림픽의 충격이 영향을 주었을 정도다. 개회식을 주관한 것은 한국인의 ‘맛과 멋’을 종합한 이어령 박사였다. 그는 보통사람이 따라가기 힘든 특출한 착상을 가진 분이었다. 이 모든 것이 종합되어 서울올림픽에서 꽃을 피웠다.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5공청산 소용돌이가 줄을 이었다. 영국인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한국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소苦笑를 지었다. 30년 전의 굿 풀이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기적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울올림픽은 구미 선진국에게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중국이 자랑하는 장예모 감독이 주관한 북경올림픽 개회식은 별로 감동을 주지 않는, 백발 삼천장(白髮 三千丈)과 같은 허풍이었다.
서울올림픽 기적의 중심에는 故 박세직 장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