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이명박한테 배우는 ‘교만과 인색’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교차인(驕且吝)이라는 말이 있다. <논어> 8편 ‘태백’(泰伯) 제11장에 나온다.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 不足觀也已”(자왈, 여유주공지재지미 사교차린 기여 부족관야이)

이런 뜻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비록 주공과 같은 훌륭한 재능을 지녔다 해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나머지는 보잘 것이 없다.”

<논어> ‘태백편’을 보면, 그렇게 훌륭한 ‘주공’(周公)의 지능이나 기예(技藝)의 극치를 지녔다 하더라도 ‘교만하고 인색’(驕且吝)하다면 그 나머지야 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교만(驕慢)은 잘난 체하는 태도로 겸손함이 없이 건방짐을 말하며 인색(吝嗇)은 재물 따위를 지나치게 아끼는 걸 말한다.

‘인색’은 어떤 뜻인가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서 다산 정약용은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인색’이란 ‘색시’(嗇施)라고 풀이하여 베풀기에 인색함을 뜻한다 했다. 그리고 개과천선(改過遷善)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산은 말했다. 베풀기를 꺼려하는 인색과, 잘못을 고치는 일에 인색한 경우를 설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바라던 인간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지능과 기예의 탁월함을 지녔다 해도, 베풀기에 인색하고 잘못을 고치는 일에 인색하고는 인격자가 될 수 없노라고 확언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는 것도 많은 어른이었으나 남에게 자랑하다 큰 봉변을 당한 일이 있다. 어느 날 아테네 성을 들어가기 위하여 배를 탔다. 뱃사공은 턱수염이 짙은 50대 장정이었다.

그는 뱃사공이 열심히 배를 젓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농담을 걸었다. “아저씨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거저 죽지 못해 삽니다.” 소크라테스는 뱃사공에 대하여 흥미가 갔다. “아저씨! 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무식한 뱃사공이 그런 유식한 말을 알 수 있겠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더욱 농담조로 말했다.

“철학도 모르면서 살고 있습니까?” 뱃사공은 노에 힘을 줄이더니 소크라테스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선생! 선생은 그렇게 유식하신데, 수영을 하실 줄 아십니까?” “난 물과는 잘 사귀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 말이 끝나기 바쁘게 뱃사공은 그만 배를 엎어버렸다. 뱃사공은 배를 다시 바르게 하고 몸을 날려 배에 올랐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소크라테스는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 주제에 철학이 뭐고, 인생이 뭐요? 건방지게 철학만 알면 다요?” “아저씨! 제발 잘못했으니 한번만 용서해 주시오. 사람 좀 살려 주시오.” 뱃사공은 소크라테스를 건져 주었다. 배에 오른 소크라테스는 물에 빠진 쥐 모양 움추리고 앉아서 말했다.

“내가 미처 몰랐습니다. 내 자신을 몰랐습니다. 아저씨는 나의 또 한사람의 선생님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배에서 내려 아테네 성으로 갔다. 그가 들어가자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에게 소리쳤다.

“청년들아! 너희들 자신을 알아라. 사람은 무엇보다 자기를 잘 알아야 되는 법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소크라테스는 결코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매사에 조심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인색’에 대한 예화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일화다. 요즘 이 전 대통령이 재판을 받고 있는데, 그 측근들이 ‘주군’을 보호하지 않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명박의 인색함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익은 자신이 챙기고 측근들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측근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얼마나 사익을 취했는지 다 아는데, 이익을 공유하지 않으니 당연히 사이가 금 간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고립무원(孤立無援), 사면초가(四面楚歌) 신세가 된 것이다. 결국 인색함으로 인하여 측근도 잃고 돈도 명예도 다 잃게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공자께서 사모하고 숭배하면서 따르려 했던 사람이 세 분이 있다. 요(堯)와 순(舜)이 최고라면 요순과 똑같이 여겼던 사람이 주공(周公)이다. 오죽했으면 평천하(平天下)의 꿈에 부풀어 천하를 경륜(徑輪)하려던 젊은 시절에는 밤마다 꿈에 주공이 나타났다고 한다.

주공과 같은 대성인(大聖人)에게도 교만과 인색함이 있다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주공은 인색하지 않았다. 벼슬하지 않는 선비에게 폐백(幣帛)을 가지고 찾아가 스승의 예를 갖추어 만난 사람이 12인이나 되었다. 궁벽한 마을의 가난한 집으로 찾아가 만난 사람이 49인이었다. 심지어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주느라 먹던 밥을 입에서 세 차례나 뱉고, 머리를 감다가 세 차례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사람을 만나주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주공의 겸손함은 가히 성인이라 하겠다.

교만과 인색으로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조금은 바보 같지고 베풀며, 세상을 위해 맨발로 뛰는 것이 도인(道人)이고 성인(聖人)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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