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9일]소련 독재자의 딸 망명한 날
2004 허블 우주망원경 촬영 성공
2004년 3월9일 미국 우주망원경과학연구소(STSI)가 우주 대폭발(빅뱅)이 일어난 깊은 우주에서 별이 생성되는 것을 최초 관찰했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소는 자체 보유한 허블 우주망원경(HST)으로 130억 광년 이상 떨어진 먼 우주에서 초기 은하들이 충돌하며 기묘한 형태를 갖춰가는 모습을 촬영했다.
허블 울트라 딥 필드(HUDF)라는 장비에 포착된 모습은 137억 년 전 대폭발로 탄생한 우주의 나이가 7억년도 안됐을 때 출발해 130억년 이상 우주공간을 날아온 빛의 흔적으로, 초신성의 흔적인 것으로 추정됐다.
허블 우주망원경이 지구를 400 바퀴 이상 도는 시간인 100만초 동안 우주의 한 지점을 촬영한 이 사진에는 1만여개의 은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일부는 서로 뒤섞여 혼돈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STSI 과학자들은 이처럼 멀리서 오는 약한 빛을 포착하는 것은 달 표면에 있는 반딧불이를 촬영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천체과학자들은 별과 우주의 생성과 진화에 대한 근본적 의문들을 밝히는데 이 사진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당시 어떤 망원경도 이 정도 거리의 우주를 이렇게 선명하게 촬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2003년 컬럼비아호 참사 뒤 허블 우주망원경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보수 임무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보수는 계속돼 수명이 계속 연장됐고, 2009년 5월19일 수리로 수명이 5~10년 더 연장됐다. 미국은 허블망원경의 후임을 맡게 될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을 개발, 2014년까지 테스트를 마치고 2015년 이후 발사할 예정이다.
그때까지 1953년 작고한 미국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은 우주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허블의 임무를 계속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2002년 한국의 ‘걸레 스님’ 타계
2002년 3월9일 ‘걸레 스님’으로 알려진 한국의 승려 중광 스님(속명 고창률)이 지병으로 타계했다. 시인이자 화가였던 그의 별명 ‘걸레 스님’은 1977년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초대전에서 그가 <나는 걸레>라는 자작시를 낭송하면서 붙여졌다.
늘 “나는 걸레다”, “내 생활 전부가 똥이요, 사기이다”라고 외친 바, 파격과 기행을 일삼은 파계승이었다. 불가도 그의 승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제주도가 고향인 그는 1960년 양산 통도사에서 입산했지만 불교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기행 때문에 1979년 승적을 박탈당했다. 그는 그러나 영국 왕립아시아학회(1977년)·버클리대학(1980년)·록펠러재단(1983년) 등에서 선화와 선시를 발표하면서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성기를 노출시킨 동물 그림, 자신의 성기에 붓을 달고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 외국 대학 강연 중 여학생과의 키스 등이 지구촌 사람들에게 남긴 그의 파격적 이미지였다. 현실 종교의 숨 막히는 율법과 번뇌마저 거부하고자 했던 자유주의자 ‘중광 스님’의 묘비명은 “괜히 왔다 간다”이다.
미국 버클리대 랭커스터 교수가 펴낸 책 <광승>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나는 걸레
– 중광스님
반은 미친 듯/반은 성한 듯/사는 게다.
삼천대천세계(三天大天世界)는/산산히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레/남한강에 잉어가/싱싱하니
탁주 한통 싣고/배를 띄워라?
별이랑, 달이랑, 고기랑/떼들이 모여들어
별들은 노래를 부르고/달들은 장구를 치오
고기들은 칼을 들어/고기회를 만드오?
나는 탁주 한잔/꺾고서/
덩실, 더덩실/신나게 춤을 추는 게다.
1967년 스탈린 딸 스베틀라나 망명
1967년 3월9일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당시 41살)이 인도 주재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의 두번째 부인(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이 낳은 딸로, 그녀의 어머니는 말년에 스탈린의 무지막지한 학대 속에 1932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스베틀라나는 16살에 연인과의 사랑이 문제가 돼 10년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스베틀라나는 1953년 스탈린 사후 아버지의 성 대신 어머니의 성(알릴루예바)을 따른다.
1966년 당시 연인인 인도인이 죽자 그의 유해와 함께 인도로 가서 이듬해인 1967년 3월 망명했다. 스베틀라나의 망명에는 미국 CIA가 깊숙이 간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에 도착한 그는 아버지와 소련정부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1967년은 소비에트혁명 50주년이었는데 소련의 최고장기집권 지도자의 딸이 경축일에 조국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하자, 소련은 격분했다. 그녀를 정신병자로 지칭하기도 했다.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을 거치는 등 그녀 자신의 인생도 순탄치 않았다. 망명 뒤 냉전체제에서 미국에 이용당하는 삶도 편할 리 없었다. 결국 1984년 아버지의 고향인 그루지야로 돌아갔다가 다시 1990년 영국행, 그 이후 행적이 묘연했다. 그러는 동안 자본주의 서방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 뒤 거의 은둔생활을 해온 그녀는 지난 2011년 11월22일 미국 위스콘신 주 리치랜드센터에서 결장암으로 사망했다. 85세였다. 냉전은 그녀의 정체성과 행복, 안정을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