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자이니치 2세①] 쿠보즈카 주연 ···”국경선 따위는 내가 없애”

[아시아엔=이주형 기자] 경계인. ‘오랫동안 소속돼 있던 집단을 떠나 다른 집단으로 옮겼으나, 원래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버릴 수 없어 새로운 집단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 사람’을 뜻한다.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이른바 ‘자이니치 코리안’은 경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자이니치 2세들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느 한 집단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자아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이니치 2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애국, 통일, 동포, 친선, 민족, 조국, 국가, 단일, 지겨워.”

<고>(2001)의 주인공 스키하라(쿠보즈카 요스케 분)의 첫 대사다. 농구부원인 스키하라는 연습 도중 패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린치당한다. 그러나 단순히 패스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랬을까? 스키하라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일본인이 아닌 재일한국인, 자이니치다.

영화는 잠시 과거로 되돌아가 한 지하철역을 비춘다. 스키하라는 조총련계 학교 친구들과 지하철로를 뛰어다니고,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힌다. 스키하라와 친구들은 흔히 말하는 양아치다.

경찰서에서 아들을 보자마자 쉴 새 없이 주먹을 날리는 아버지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유망했던 복서이자 마르크스주의 신봉자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과 차를 타고 가다 길을 멈추고 바다나 보고 가자고 한다. 평소 무뚝뚝하기만 한 아버지이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아들에게 “국적은 간단히 바꿀 수 있어. 돈만 있음 어디든 갈 수 있다. 넓은 세상을 봐라. 그리고 네 스스로 결정해”라는 말을 건넨다.

하지만 스키하라가 연신 머리를 굴려봐도 답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일본인처럼 사회에 순응하며 살 수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이니치란 한계를 극복할 자신도 없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막 살다 야쿠자의 총알받이가 되는 것도 싫다. 스키하라에겐 그러나 선택할 권리와 의지만큼은 있었다. 그는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해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고 일본인 학교에 다니기로 마음 먹는다. 그 결과는… 영화 첫 장면의 난투극이다.

큰 결심을 하고 일본인 고등학교로 진학한 스키하라. 그러나 스키하라는 조총련계 학교를 등지며 과거 친구라 불렀던 이들에게 자본주의에 물든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 자이니치란 이유로 일본인 학생들에게도 차별을 받을 뿐이다.

예전의 일로 학교깡패들의 숱한 도전도 물리쳐야만 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스키하라가 상대에 굴복해 무릎 꿇는 일만은 없었다. 그런 스키하라에게 갑작스런 사랑이 찾아온다. 친구의 파티에서 만난 사쿠라이(시바사키 코우 분)와 눈이 맞아버린다. 차별과 멸시에 맞서 싸워온 그에겐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예상치 못했던 슬픈 소식이 들려온다. 조총련 친구들이 등을 돌려도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아줬던 친구 정일이 일본인 남학생과 조총련 여학생의 사소한 실랑이를 말리다 살해당한 것이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다”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 한 구절을 남긴 채.

그 사건 이후 무기력해진 스키하라. 그런 남자친구에게 사쿠라이는 사랑을 고백한다. 그런데 스키하라는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다. 자신이 자이니치라는 사실 말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온 스키하라.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고야 만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추려 “중학교 때까진 북한 국적자였다” “곧 일본 국적을 취득할 지도 모른다” “국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사쿠라이의 반응은 너무나 차갑다.

“아빠가 중국인이나 조선인과는 만나지 말라”고 했다면서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쿠라이. 그녀는 촌스럽다고 생각해 비밀로 간직했던 이름 츠바키(동백꽃)를 밝히며 흐느낀다. 스키하라도 너무 외국인 같아 차마 알리지 못했던 자신의 본명 이정호를 말하며 그녀 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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