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 78돌···사령관 지청천·참모장 이범석

[아시아엔=박남수 철기이범석장군기념사업회 회장, 전 육사교장] 8월 4일은 78년 전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광복군총사령부’가 창설된 날이다. 광복군은 9월 17일 정식 창설식을 가지나 총사령부는 8월 4일 사전 창설돼 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이 임명되어 광복군 창설작업에 들어갔다.

철기 이범석은 임시정부라는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앙무대에서 그동안 닦아 온 최고위급 군사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광복군 창설 배경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 20여년이 지나지만 뚜렷한 대일투쟁의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독자무력에 의한 국토회복이나 외교적 노력만의 국권회복은 비현실적인 가운데, 남은 것은 일제가 스스로 망하는 때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1939년 독일의 폴란드 공격으로 바야흐로 인류는 세계전쟁이라는 대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절호의 시기에 우리 군대를 한시바삐 만들어 연합군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방략이 임시정부에 세워진다.

군대 창설에 유리한 여건으로 당시 대부분의 한인무장 세력이 중국 내륙에 들어와 있었다. 1932년 만주국의 건설로 만주지역에서의 조직적인 투쟁이 어려워지자 대부분 독립군들이 중국 내륙 화북지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이 주축이던 대한독립당군과 사회주의자들이 대다수인 조선혁명당의 조선혁명군이 그들이다.

임시정부 움직임과는 무관하게 김원봉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한다는 명목으로 화북지역 조선혁명군을 바탕으로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 통제 조건으로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김원봉은 중국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는 인맥을 바탕으로 임시정부보다 한발 빠르게 무장력을 조직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 공격으로 서쪽지방으로 계속 이동하던 불안정한 상황으로 군대 창설이 지지부진하던 차에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창설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부인데 무장단체 결성에서 조선혁명당에 뒤진 것이다.

지청천 사령관, 이범석 참모장 취임

1940년 초, 중국 국민당 중앙훈련단 중대장이던 이범석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충칭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요인들과 재회하였다. 중국 군부와의 접촉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임시정부에게 철기는 천군만마였다.

1940년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창당된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중국 정부와 교섭을 진행하면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의 명의로 ‘한국광복군 편찬대강’이라는 광복군 편성계획서가 장개석에게 전달되었다.

애초 철기는 광복군이 한국독립당 군대로 창설되는 것을 보고는 이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는 파벌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그의 예리한 통찰력이다. 사실 이후 광복군에는 김구 직속파, 지청천의 만주 한국독립당군파, 김원봉의 조선혁명당파 등이 서로 얽혀 파벌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오죽하면 장준하와 김준엽 같은 일제 학병들이 임시정부로 탈출하여 와서 파벌 싸움을 보고 크게 분개하였겠는가?

이범석은 김구와 내무총장 이시영 등과 조속히 광복군을 만들어 세계대전 발발시 연합군 일원으로 가담해야 한다는데 뜻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광복군 창설 준비기구로 ‘광복군 창설 7인위원회’가 조직되고 임시정부와 무장독립투쟁 지도자를 대표하여 김구, 박찬익, 지청천, 유동렬, 김학규, 조경한, 그리고 중국군직을 사임한 이범석이 여기에 참가하였다.

광복군 창설을 위한 중국 국민당과의 교섭은 지지부진하기만 하였다. 그러자 이범석이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봅시다”라고 조기 창설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하려면 시각이 급하므로 여건은 불비하지만 만들어 놓고 중국측과 계속 협상해 나가자는 논리였다. 김구가 여기에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광복군 창설 후 1년이 지나서야 중국측의 승인을 받았다.

중국측의 광복군 승인 지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장개석과 중국 국민당 지도자들은 1927년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 봉기시 황포군관학교에 있던 많은 한인들이 가담하였던 것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었다. 일부 중국 지도부는 한국인 투쟁 목표가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라고 오해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민당 내부에서는 수백명밖에 안되는 한국 광복군 인준이 그리 서두를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도 있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상층부의 인식을 일거에 바꾸어 놓았지만 아직은 멀었다. 장개석은 동의하였으나 광복군 인준은 군사 실무적 수준의 일로 중국군 참모총장의 소관사항이었다. 임시정부에 합류한 이범석은 능숙한 중국어와 인맥을 바탕으로 중국군의 여러 인사들을 상대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여러 불신요인들을 해명하면서 한국인이 중국과 동맹이 되면 발생하는 여러 국제정치적, 군사전략적 유리점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였다.

철기는 중국 군사위원회 실력자 후성장군을 찾아가 따지기도 하였고, 김구가 추가화를 통해 장개석과 직접 면담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측의 인준은 별개로 우선 군대를 창설하기로 방침을 정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드디어 광복군 창설식인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충칭 가릉강가에 위치한 가릉빈관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외국 귀빈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중국 중앙정부의 요인들과 주요 군 지휘관, 각 사회단체의 간부들, 각국 대사 등 외교사절과 신문기자들이 참석하였다.

초창기 광복군의 임무는 중국에 분산된 한인 무장력을 총 집합시켜 중국군과 연합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일제를 박멸하는데 최우선을 두었다. 이를 위해 군의 경비나 장비는 외원으로 충당하고 대량으로 군 간부를 단기 양성하며, 창설 1년 이내에 최저 3개 사단을 편성하여 중·미·영 등 연합군의 교전단체로 참가하여 국토수복시 까지 투쟁을 끊임없이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광복군은 창설되었으나 중국측의 승인과 원조는 여전히 부진하고 미온적이었다. 중국군은 광복군을 동맹군이 아닌 자신들의 지원군 내지는 보조군으로 예속하고자 하였다.

중국 14개월 지나서야?군사위에 편입시켜?

이에 광복군은 그 위상이 양적 규모에 좌우된다고 판단하고 인적 기반 확대를 최우선 사업으로 택하였다. 화북지방의 20여만 동포들을 대상으로 초모(招募)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위해 사령부를 섬서성 시안으로 이동시켰다. 이범석은 충칭에 잔류하여 중국 군사위원회와 군사협정과 지원문제 등을 계속 협의하였다.

1941년 드디어 중국 군사위원회는 광복군을 중국군 예속을 전제로 광복군 성립을 인준하기로 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정책이 결정된 것은 철기의 노력과 함께 김원봉 휘하의 조선의용대가 대거 화북으로 진출하여 중국 공산당 산하로 들어가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한국 무장세력들을 확실히 장악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군사위원회는 1941년 10월 31일 “한국 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동시에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중국군 참모총장이 직접 통제한다”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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