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어머니 헌신이 철기 이범석 독립운동 ‘견인’
[아시아엔=박남수 ‘철기이범석기념사업회’ 회장, 전 육사교장] 한석봉·김구 등 위대한 인물의 성장과정엔 어머니의 사랑과 훈육이 등장한다. 철기 이범석 장군(1900~1972년)도 그렇다. 그러나 다른 게 있다. 철기의 경우는 생모가 아니라 새어머니란 점이다.
철기의 새어머니는 강릉분으로 무학이었으나 지식과 지혜가 높았다. 철기는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하는 새어머니 곁에서 한문공부를 하곤 했다. 이때 어머니는 틀린 곳을 바로잡아 주었다고 한다.
철기가 아홉살 때, 아버지는 강원도 이천 군수로 발령 받았다. 당시 철기의 장난기는 유명했다. 하루는 당나귀를 타고 가는 일본인 금융조합 이사장을 고무총으로 맞춰 부상을 입혔다. 부친은 엄청난 치료비로 물어줘야 했다.
한번은 임진강에서 자라를 잡다가 그 억센 자라에 혀를 물리기도 했다. 그런 철기를 아무 꾸지람없이 정성껏 치료만 해주는 새어머니 모습에서 철기는 서서히 어머니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철기가 임진강에서 잡은 뱀장어를 소 항문에 넣는 장난을 쳐 소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소는 농가의 제일 큰 재산으로 많은 돈을 물어줘야 했다. 노발대발한 아버지가 마당에 서 있는 철기에게 방적기 지레를 던졌다. 이때 새어머니는 본능적으로 철기를 감싸안았다. 그러자 지레 쇳덩어리가 새어머니 복숭아뼈를 부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새어머니는 철기를 혼내기는커녕 감싸면서 철기의 심한 장난질을 넌지시 꾸짖기만 했다. ‘내가 계모라서 철기를 잘못 가르치고 있구나’….. 이에 철기는 새어머니의 자애에 감동하여 밤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공부하기로 작심했다.
그 이후로 철기는 변했다. 모범생이 된 것이다. 보통학교 졸업 때는 강원도 전체에서 세명 뽑히는 최우등생으로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제일고보에 무시험 합격했다. .
철기는 해외 망명 이후 투쟁생활의 연속이다 보니 자연 어머니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철기를 떠나 보낸 새어머니는 하루도 눈물 마른 적이 없었다. 유일한 삶의 기둥인 아들이 독립군으로 있다는 풍문만 들었을 뿐 생사·안위조차 모르니 어머니 심정은 갑갑하고 우울하기만 하였다.
게다가 새어머니는 당신의 소생이 없어 아버지와 사이가 격조하였다. 이에 어머니는 명문 이씨댁의 손을 끊을 수 없다는 생각에 소실을 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철기 부친은 얼마간의 주저 끝에 새가정을 꾸몄다.
그런 가운데 어머니는 철기를 찾아 여인의 몸으로 그 험한 만주 길에 나섰다. 철기는 이마에 총탄을 맞고 동지들의 손에 의해 어려운 치료를 받고 있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철기는 어머니 환상을 보고 “어머니!”라고 소리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거짓말 같이 그곳에 어머니가 자비로운 모습으로 와계셨던 것이 아닌가? 철기 모자는 덥석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어머니. 웬일이십니까. 꿈이 아닙니까. 어머니가 어떻게 이곳에까지……”
어머니는 철기를 찾아 만주땅을 헤맨 끝에 철기가 있는 곳에 마침 당도하신 것이었다. 철기의 애국심과 어머니의 지극한 모정에 하늘이 감동한 것일까? 철기는 어머니의 정상 어린 간호로 부상에서 회복되었다.
어머니는 다시 서울로 떠나며 친정으로부터 물려받은 당신 몫의 전답을 판돈 1700원을 모두 철기에게 남겼다. “이젠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철기는 그 후 어머니가 주신 돈으로 총과 폭탄을 사서 고려혁명군 결사단을 조직했다. 결사단 결성에는 두 여인의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새어머니는 재산으로, 철기와 결혼한 마샤는 유창한 러시아어로···.
아들을 만나보고 귀국한 새어머니는 종로서로 잡혀갔다. 일제 경찰의 만행이 어찌했으라는 것은 짐작 가고도 남는다. 종로서에서 풀려 나온 어머니는 만 2년을 강원도 산사에서 정양해야 했다. 2년 후 서울 천연동 집에 돌아오자 새어머니는 10년을 약정하고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어떤 고된 일이나, 눈비가 쏟아지나 아랑곳 않고 자정에 영천 약수물을 떠다가 철기를 위해 백일기도를 올렸다.
백일기도 올린 지 8년째 되던 해, 어머니는 철기 누님을 불러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내 마음은 범석이 보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다. 10년 기도를 다 못 드리고 가는 게 한이다만 내가 죽더라도 땅에 묻지 말고 화장한 뒤 뼈를 갈아 한강에 뿌려다오. 뼛가루나마 날아가서 범석이를 보아야겠다.”
광복 후 철기가 고국에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분이 아니었다. 무덤조차 없었다.
만년에 철기는 어머니와 관련한 그 아련한 과거, 어머니가 슬픈 그러나 한없이 보드랍고 인자한 눈매로 자신의 핏자국을 닦아주시던 모습을 회상하곤 했다.
흑단같이 고운 머리에 노상 희고 단정한 무명옷의 어머니. 철기의 어머니는 계모셨지만 세상에 다시 없는 훌륭하고 슬기로운 어머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