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클래식] 괴테가 꿈꾸는 ‘이탈리아 기행’···”무작정 떠나라, 지금 여기서”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고식적인 내 둘레를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게 했다. 아스라한 고전의 향기 속에 마주한 괴테의 두툼한 책 한권.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지금부터 232년 전인 1786년 9월 3일부터 1년9개월 동안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시칠리아와 전 유럽인이 동경하는 르네상스의 발상지 로마 등을 두루 여행하면서 일기형식의 702쪽이나 되는 방대한 기행문을 남겼다.

괴테는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첫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1786년 9월 3일 새벽 3시에 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8월 28일 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려고 했던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아마 나를 붙잡아둘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이곳애서만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여행가방과 오소리 가죽 배낭만을 꾸린 채 홀로 역마차에 몸을 싣고 7시 30분에 츠보타에 당도했다”

그는 당대의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왜 떠났을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품>의 작가이며 시성(詩聖)으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으면서 황제로부터 귀족의 은전을 하사받은 민정장관의 신분인 그였다. 그는 한 상인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여행을 하였다. 왜 자기 생일파티장에서 도망을 쳤을까?

스스로 깊은 내면의 지성을 갖추고자 한다면 반드시 괴테를 만나야 한다. 괴테라는 이름에서 아스라한 고전의 향기를 느끼며 여행의 참된 의미를 찾아 떠나는 길….

길 떠나는 괴테의 발길에서 풍류가 흐르고 먼 길에서 돌아온 그의 탐험기록마다에서 한결 정겹고 성숙한 삶의 향이 물씬 풍겨나는 그런 만남. 우리는 230여년이 지난 지금 괴테와 마주한다.

내가 괴테를 제대로 만나기까지 구십년이 흘렀다. 그는 명예, 재물보다는 변화 없는 일상의 속된 삶을 진부하고 더할 수 없는 방종으로 여겼다. 그는 떠나야 했고, 화려한 생활 속에 가려진 안식을 견디지 못해 했다. 그가 과감히 떠난 처절한 심정을 나는 그의 저서 <파우스트>에 나오는 저 유명한 구절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다”에서 가슴을 쳤다.

詩人은 죽어서도 詩를 쓴다.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시성으로 추앙받던 괴테는 천상의 서곡인 <파우스트>를 21세때 집필하여, 38년의 긴 세월을 거쳐 59세때에 탈고했다. 美와 품위에 대한 감성을 몸에 익혀 예술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한 그는 침체기를 겪으면서 아름다운 실러를 만나 많은 격려에 자극을 받아 중단되었던 <파우스트>를 다시 이어 썼다.

괴테가 문학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을 때 무도회에서 샤를롯데 부인을 만나 격정의 연정을 품었으나 그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어 고뇌하며 단념하게 된다. 이 샤를롯데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롯데의 모델이다.

나는 여행 중에나 또는 텅빈 나의 농막에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 섹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펼쳐들고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과 견주어 본다. 세 문호들이 남긴 걸작에서 인간의 절실하고도 절박한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잠언이 발견될 때마다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지른다.

나를 돌아보게 한 영혼의 길잡이

세상이 혼미해지고 갈등이 많아질수록 다양한 인문학 책을 탐독하며 자기해방을 위한 여백의 시공간으로 넋을 자유롭게 한다.

인생은 여행이다. 여행의 고전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여행은 위대한 학교이니까.

나는 여행배낭만 봐도 가슴이 뻥 뚫린다. 인문학에 눈이 뜨이고 역마살에 이끌려 이방인이 된 연유다. 생의 흥망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포퓰리즘을 멀리하는 문화수준의 차이로 결정된다.

정처 없는 여행이 사람을 훌쩍 키운다. 모두가 바라는 행복, 잘 산다는 것은 인생의 허무나 좌절, 갈등, 범민 따위를 걷어치우고 순간을 살아내고 뒤돌아보지 않는 마치 괴테의 여행처럼!

나는 묵직한 배낭을 메고 정신없이 마구 뛰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기차역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지도를 들고 역에서 도보로 반시간쯤 걸리는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괴테하우스에 당도했다.

나는 59세 때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년에서 일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투병 중에 걷다 죽으려고 3년 후인 62세때 한국을 떠나 정처 없는 보헤미안이 됐다.

여한 없는 집시

미국과 인도, 네팔을 거쳐 유럽으로 숨어들었다. 의사의 사형선고를 비웃듯 죽지 않고 살아낸 증표로 유럽의 걸인(乞人) 노숙자로 변신했다. 초라한 한국의 잡초에 불과한 초로(初老)의 뜨내기가 그 거창하고 수려한 괴테하우스를 우러러보며 가슴 벅찬 석고상이 됐다.

괴테하우스는 고색 찬란한 3층 대리석 건물의 저택이었다. 장구한 세월이 흘러 도시화가 되어서인지 정원은 협소하고 바로 옆에 건물들이 즐비했다. 서재 한쪽에 놓여있는 작은 피아노에서 베토벤의 운명곡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괴테가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나도 그 옆에 나란히 섰다. 괴테가 애용했을 책상 위에는 책이 펼쳐져 있는 옆에 펜대가 가지런히 놓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머지않아 나도 그와 같이 쉬게 되리라.

나는 꿈꿨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괴테처럼 83세를 살아낸다. 괴테처럼 오스트리아를 거쳐 이탈리아 북쪽 땅 끝, 볼치노 알프스산맥을 격파하고 괴테의 여로를 따라 그의 흔적을, 그의 여정을, 그의 정열을!!’

1991년 봄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광과 위대한 문명의 발상지 이탈리아를 나는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채 초로(草路)의 나그네로 건넜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 내내 새로운 지식흡수에 몰입했다.

괴테는 길도 없었을 18세기에 역마차를 타거나 걸으며 1년 9개월 자기와의 아름다운 전쟁을 벌였다.

“동봉한 종이쪽지에 통과한 역들의 이름을 적어놓았지만, 나는 다음날 아침 10시에 여유 있게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했다. 다시 말해 24.5마일의 거리를 31시간 만에 주파한 것이다”(15쪽)

역마차의 속도를 시간당으로 환산하면 1.26km/h 즉 한 시간에 불과 1.26km을 달린 셈이다. 당시 도로사정이 얼마나 열악한 지 짐작 간다. 당시에는 여관이나 숙소도 거의 없었을 사정에서 기행문을 보면 용케도 거처를 전전했다.

괴테가 여행 중에 크게 관심을 쏟은 분야는 자연과 인간사회, 그리고 예술분야였다. 또한 지질학, 기상학, 동물학, 식물학까지 포함한 과학 분야이다. 그는 ‘식물의 원형’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전개하였고 해부학에 대하여도 깊이 연구했다. 그의 ‘색채론’은 지금도 유용하게 응용되는 분야다. 기행문을 보면 도처에 이들과 연관된 문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행서는 객관적 여행정보를 전해주는 여행안내서가 아니다. 괴테 자신의 삶과 자기수양 과정을 자세히 자신을 향해 속삭이고 고뇌하며 사유하는 기록이다. 기행문 여러 곳에 괴테가 직접 스케치한 그림을 보며 뛰어난 예술 감각에 경의를 표한다. 두 세기가 넘는 고전의 기록인데도 우리의 눈높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는 여행의 참된 의미가 변질되고 퇴색되어 가는 감이 든다. 이런 풍조는 점점 더해질 것이다. 과소비, 호화사치, 놀이 외유가 범람하고 해외연수를 빙자한 선심관광 등 거품외유로 귀중한 외화를 낭비한다. 인문학과 예술 그리고 미래지향의 세련된 고품격 문화생활을 위한 자기수양이 절실하다.

이제 짐을 꾸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내게 그토록 사랑스럽고 소중했던 모든 것을 뿌리치고 떠나왔지만 지금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너무 많은 준비를 한다는 말이 절실하게 와 닿는다.

“내일이면 우리는 나폴리로 간다. 나는 저 낙원 같은 자연 속에서 외로운 자유와 기쁨을 얻을 것이다.”(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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