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취임] 지역과 이념 넘어 지방분권 시대로

대구-광주 동맹 행사

[아시아엔=조정래 <영남일보> 논설실장] 대한민국에서 지방사람으로 사는 게 참으로 힘들다. 평소 그 어려움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단순히 지방에 발을 딛고 산다는 지정학적 조건 탓에 당하는 부당함은 차이가 없다. 차별을 받지 않는 차이를 인정받고 싶지만 강고한 수도권주의는 그 간단한 민주의 원리와 원칙을 허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이전에 ‘수도권공화국’이다. 수도권 집중과 그 폐해를 아무리 떠들어도 공화국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같은 무관심과 무자비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 지배와 피지배,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해 아무 개념이 없거나 알더라도 나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일 터이다. 수도권 집중으로 인해 지방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피폐가 새삼 부각되고 있는 요즘, 수도권과 지방의 상생과 그를 가능하게 할 지방분권이 지방의 화두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지방은 식민지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일찌감치 지방민은 식민지 백성이라고 힘주어 설파했다. 지방의 독립을 위해 지방분권운동이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지 어언 15년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방의 풀뿌리들은 공화국의 점령군에 동화되거나 핍박의 현실에 순응해 온 관성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지방분권이 지방민 속으로 속속들이 들어가기에는 아직도 시기상조라는 지방의 자체진단 속에 여전히 고군분투하며 가보지 못한 길을 내야 할 상황이다. 지방분권 개헌이 그 첫걸음이다.

지방민의 수난사는 지역주의와 이념갈등의 희생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대치 정전의 분단상황에서 반공을 앞세운 이념의 소용돌이는 우리 국민 모두가 겪고 있는 진통이지만 영호남 사람들은 외부에서 악의적으로 조성한 지역주의라는 괴물 아래 이중의 고통을 당해 왔다. 지난해 4·13 총선을 거치면서 이러한 지역주의 벽을 허문 영호남 사람들을 포함한 지방민들은 이제 또 다른 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지방분권을 시대적·국가적 과제로 관철시키기 위한 대장정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지방민들은 새 대통령이 지방분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기에 거는 기대도 클 수밖에 없다. 지방민의 소망은 서울사람 지방사람 차별 없는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소박하지만 쉽지 않은 희망이다. 처방을 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현주소에 대한 진단이 긴요하다.

지역주의 망령 영원히 잠 재워야

지역주의의 뿌리는 사회과학적 접근과 분석을 요하는 일이라 여기선 논외로 돌린다. 그보다는 지역주의가 어떻게 작동되고 조장돼 왔는지 그 메커니즘을 분석해보는 게 이해하기 쉬울 뿐 아니라 발호를 막기에도 유효하다. 영호남지역주의는 기득권 정당과 정파의 정치적 이해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악용돼 왔다. 비교적 최근에는 민주당과 한국당이 각각 호남과 영남의 분할 점유를 공고히 하기 위해 지역주의에 의지했다. 한마디로 지역주의는 진보와 보수 양당의 적대적 공생관계의 유산이다. 따라서 영호남 지역민들은 이러한 지역주의의 희생자이다.

지난 4·13 총선 민심은 무너질 줄 몰랐던 지역주의를 허무는 원동력이 됐고, 앞으로도 웬만해선 지역주의 망령에 현혹되지 않을 만큼 탄탄해졌다. 전남은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을 만들어내고, 대구는 김부겸 민주당 의원과 야권의 무소속 홍의락 의원을 배출시켰다. 특히 부산·경남은 민주당벨트를 구축하면서 탈 지역주의의 상징적 계기가 됐다. 영호남의 지난 총선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지역주의를 유권자들의 힘으로 무너뜨린 지역민들의 승리였다.

지역주의의 정치적 악용은 민심에 의해 철퇴를 맞을 가능성이 높아진 현재와 미래, 지역 간 균형발전이 새로운 이슈로 등장했다. 이를테면 영호남 소외론이나 예산의 배분 문제를 둘러싸고 상대적 차별과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정치권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지역주의는 더 이상 퇴영적이지도 않고 매도당할 필요도 없다. 물론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공평한 인재 등용은 통치와 정치의 수단이자 목적으로 정당하게 이뤄져야 마땅하다. 최근 들어 대구(달구벌)와 광주(빛고을) 사이 ‘달빛동맹’이 한층 강화되면서 교류와 상생 발전의 모멘텀을 찾으려는 두 지방정부의 노력은 골고루 잘 살자는 비수도권 주민들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다. 동반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역주의는 지양하기보다는 애향심에 근거하기에 건설적인 힘으로 권장할 만하다.

지방분권 개헌으로 통합의 시대 열어야

국민 대통합은 대선 과정에서 최대 이슈로 등장했다. ‘연정’ 혹은 ‘대연정’ 등의 공약은 물론 좌와 우의 이념적 차이까지 포용하자는 메시지였다. 한층 높아진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에 반비례해 통합을 해치는 색깔론 등 이념은 설 자리가 궁색해졌다. 이를 부추겨 온 일부 ‘수구골통’ 언론들의 입지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만 봐도 이념의 시대적 종언은 예고되고 있다 하겠다. 문제는 고질적이고 강고한 중앙집권주의인데, 이는 관료와 언론 등 수도권 기득권론자들에 의해 무시되거나 과소평가되는 바람에 아직도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어 심각성을 더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계기로 제왕적 대통령제가 개혁의 도마에 오른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중앙권력의 지방 분산·분권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 새로운 국가발전 패러다임으로 떠올랐다.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서 보듯 중앙집권적 시스템은 재난 대응에 인재(人災)를 더할 만큼 무능을 드러냈다. 국가적 재난과 사건은 이처럼 현장을 모르는 중앙관료가 모든 권한을 쥐고 좌지우지하는 한 ‘세월호 7시간’과 같은 비능률과 소모전을 피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의 연장선에서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역시 촛불집회에서 표출된 민심의 명령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지방분권개헌국민행동 김형기 상임의장(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은 “촛불의 민주시민과 태극기의 애국시민이 힘을 합쳐 분권개헌의 기치를 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그는 국회개헌특위 지방분권 분과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대선 전에는 대선후보들과 지방분권 개헌 협약을 맺은 바 있다.

지방분권 개헌은 지방분권과 자치권을 확보하는 지름길이다. 권력구조 개편이 ‘제로 섬의 권력게임’이라면 분권개헌은 ‘포지티브 섬의 국력게임’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서 보듯, 장기적인 국가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지방분권의 가치가 헌법과 제도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 새 대통령이 지방분권을 국정철학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넘어야 할 산은 높고 많다. 가장 큰 걸림돌은 지역구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가와 언론, 엘리트 지식인 등 기득권층의 강고한 중앙집권주의적 사고다. 지방분권은 노무현 정부 시절 강력하게 추진됐지만 이명박·박근혜정부를 거치면서 뒷걸음질쳤던 질곡의 역사를 안고 있다. 지방분권의 불씨를 살리자면 분권개헌을 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통합은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아 선의의 경쟁을 하는 국가개편을 통해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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