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0일]이란-서방 충돌위기, 전주곡 5년 전에 시작

2011년 슬로핸드 에릭 클랩튼과 아름다운 밤

2011년 2월20일 저녁 7시 정각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세계 3대 기타리스트 중 한명인 에릭 클랩튼의 내한 공연이 시작됐다. 이날 저녁 7시 정각에 공연장의 실내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단 몇 초도 지연되지 않은 7시 정각이었다.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에릭 클랩턴(당시 66세)은 하늘색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로 첫 곡 <키 투 더 하이웨이>를 연주했다. 블루스의 제왕 비비 킹과 협연한 적도 있는 블루스 명곡이었다. 레게 리듬의 <아이 샷 더 셰리프>로 1부를 마친 에릭 클랩튼은 2부에서 어쿠스틱기타를 들고 <리버 런스 딥>, <로킹 체어> 등 블루스로 이어갔다. <레일라>가 2부 마무리 연주였다.

3부에서 다시 펜더 기타를 들고 나온 에릭클랩튼은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원더풀 투나잇>을 연주했고, 외국인 커플은 연주에 맞춰 ‘블루스 춤’을 췄다. 마지막 곡 <코카인>은 관객들과 함게 불렀고 앙코르 곡 <크로스로드>까지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2007년에 이어 3번째 내한 공연이었다. 한때 마약에 빠져 빠른 연주가 잘 안될 당시 ‘느린 손(slow hand)’라는 별명이 그에게 붙었다. 영혼의 경혈을 콕콕 찌르는 듯한 블루스 선율은 지구촌 사람들에게 때론 슬프게, 때론 감미롭게 매료시켜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11년 리비아 정부군, 유혈진압

2011년 2월20일 리비아 특수부대원들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 용병들은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 퇴진을 외치다가 사망한 반정부 시위 희생자 장례식장을 향해 총격을 가해 최소 1명이 숨지고 14명이 다쳤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날까지 정부군과 용병들은 박격포와 기관총까지 진압에 동원, 전투에 가까운 유혈극을 벌였다. 리비아 반정부시위대는 이날까지 2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증언했다. 외신들은 하루 전날인 19일에 15명이, 그 전 날인 18일에는 35명이 각각 숨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리비아 정부는 인터넷을 차단하고 언론의 취재 활동을 제한했으며 친정부 시위만을 언론에 노출시켰다. 반정부 시위에 대해 외신들의 접근도 차단했다. 그러나 외신들은 “수도 트리폴리에서 200km 떨어진 지중해 연안도시 미스라타에서도 보안군과 반정부 시위대가 충돌했다”고 보도했고, 이를 접한 리비아 이슬람 지도자 50명은 “학살을 중단하라”고 보안군에 호소했다.

2009년 100만 한국 관객 귓전에 울린 워낭소리

2009년 2월20일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가 관객 1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보도됐다. <워낭소리>의 제작사측은 수익금의 30%를 독립 영화 발전기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혔다. 수익금 30%는 100만 관객을 기준으로 할 때 약 9억 원에 이른다.

언론 인터뷰에 나선 고영재씨는 기부금 사용 방법과 관련해 “한국독립영화협회의 선후배들과 충분히 의논하고, 영화계의 많은 선배들에게도 조언을 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 무렵 이충렬 감독 등이 이명박 대통령과 <워낭소리>를 함께 관람한 뒤 한 강연에서 한 얘기를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가 증폭해 보도했다. 이 매체는 이 감독이 이명박 대통령을 심하게 비판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이 감독은 기자와 만나 “그런 선정적인 보도는 처음 본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제작자 고영재씨와도 불편한 송사에 휘말렸다. 고씨가 약속을 어기고 과욕을 부리는 바람에 경제적, 심정적 손해가 막급하다고도 했다. 그는 고피디와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2010년 말 현재 차기작품을 구상 중이던 이충렬 감독은 ‘고피디의 배신’ 등으로 울화병으로 앓다가 급기야 머리 수술까지 받았다. 다행히 수술 예후가 좋아 2012년부터 다시 차기 작품 만들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야만 남성 용서한 이란 여성

2009년 2월20일 CNN방송은 자신을 스토킹하던 남성이 청혼을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얼굴에 뿌린 황산 때문에 실명과 큰 자상을 입은 이란 여성에 대해 보도를 내보냈다.

사고의 발단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란의 한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있던 아메네 바흐라미 씨(Ameneh Bahrami 당시 나이 31세·사진)는 2002년 대학에서 알게 된 마지드 모바헤디(Movahedi, 당시 19세)의 구애에 2년간 시달렸다.

그는 수시로 협박해 만남을 요청했고 “결혼 요청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도 했다. 2004년 10월 어느 날, 바흐라미는 퇴근길에 모바헤디가 뿌린 황산 세례를 받았다. 이 사고로 커다란 갈색 눈 양쪽을 모두 잃었다. 아름답던 얼굴도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바흐라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으로 가해 남성을 처벌해 달라고 법원에 호소했다. 바흐라미 씨는 법정에서 “내가 당한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그의 두 눈을 멀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슬람 샤리아법은 가해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되갚음을 해주는 방식(키사스)으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08년 말 이란 법원은 바흐라미 씨의 요구대로 모바헤디 씨의 눈을 멀게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이 2009년 2월3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모바헤디 씨는 두 눈에 황산 20방울을 투약하는 처벌을 받게 됐다.

이 형벌은 같은 해 4월15일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해 형 집행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란 법원은 모바헤디의 항소를 기각했다. 2011년 5월14일 다시 형이 집행될 예정이었지만, 다시 형 집행 기일이 무기한 연기됐다.

두 달여 뒤인 2011년 7월31일 아메네 바흐라미는 모바헤디를 용서했다. 그녀가 그 악마를 용서한 이유는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2007년 이란 우라늄농축 강행

2007년 2월20일 이란 정부는 다음 날인 21일까지로 못 박은 유엔 안보리의 ‘완전하고 지속적인 우라늄 농축 중단’ 결의를 거부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란 핵개발 중단을 요구하는 미국·유럽연합과 이란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Ahmadinejad) 이란 대통령은 이날 “이란의 ‘평화적 핵개발’ 포기를 원하면, (서방국가들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라늄 농축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한 만료일인 이튿날에는 “가능한 최단 시간 내에 정당한 권리인 핵 기술 개발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며 “우리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라늄 농축은 핵발전소의 연료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과정이나, 우라늄 235가 90% 이상 고농축될 경우 핵탄두로 쓰일 수 있어 국제사회는 이란의 우라늄 농축을 반대한다.

미군은 이날 이란 인근 오만 해에 두 번째 항공모함 존 C 스테니스호를 배치했다. 이란 혁명수비대도 16개주에서 총 6만 명이 동원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날 군사적 대치는 꼭52년이 지난 2012년 2월 현재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둘러싼 실제적인 전쟁 위험으로 차츰 가시화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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