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9일] 덩샤오핑, 앙드레 지드 ‘지다’
2008년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사임
2008년 2월19일 사회주의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 49년 만에 권좌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쿠바공산당 기관지인 그란마는 이날 “카스트로가 국가평의회 의장직과 군 최고사령관직에서 사임한다”고 보도했다.
카스트로는 “나는 평의회 의장직과 군 최고사령관직을 바라지도 않고 받아들일 의사도 없다”면서 “나의 유일한 바람은 한명의 병사로서 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스트로는 2006년 7월31일 장출혈로 수술을 받은 뒤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당시 국방장관에게 국정운영을 맡겨왔다. 2012년 2월 현재 국가평의회 의장이 된 라울 카스트로 는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이 본격화된 1953년 이래 형인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 전선’에 참여해왔다. 2012년 85세가 된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집권한 뒤 미국 플로리다주(州)에서 불과 145㎞ 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쿠바를 공산주의의 요새이자 냉전의 발화점으로 만들었다.
카스트로는 집권후 문맹 퇴치를 위해 노력하고 국민건강보험 체제를 도입하는 등 쿠바인의 복지를 위해 노력해온 반면 반체제 인사 수 천명을 수감하고 사유재산을 압수해 상당수 쿠바인들이 보트에 의지해 미국으로 탈출하는 ‘엑소더스’를 조장했다.
쿠바는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정권이 붕괴한 이후 지구상에 남아있는 5개의 공산국가 중 하나다.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지난 1월29일 열린 쿠바 공산당 특별대회 폐막연설에서 “공산당 중심의 강력한 1당 체제를 옹호한다”고 밝혔다.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최근 수도 아바나의 컨벤션 센터에서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2007년 인도-파키스탄 평화 열차에 폭탄테러
2007년 2월19일 오전 1시50분쯤(현지시각) 인도 하르야나주 드와나역 근처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을 운행하는 열차에서 테러로 추정되는 폭발 사고가 발생, 68명이 불에 타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 승객 610명을 싣고 인도 뉴델리를 출발해 파키스탄 라호르로 향하던 ‘삼자우타 익스프레스’ 는 양국의 평화를 상징하는 열차였다.
평화열차에서 폭발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이면서 순식간에 객차 2개가 완전히 불에 탔다. 사고 직후 인도 경찰은 불이 나지 않은 객차 좌석 아래에서 터지지 않은 조악한 폭발물 세 개와 휘발유병 2개를 발견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평화협상을 방해하려는 파괴행위로 추정됐다. 사고 다음날 파키스탄의 후르시드 카수리 외무장관이 뉴델리에 도착, 양국 간 신뢰 구축을 위한 대책 마련에 합의할 예정인 것을 알려졌기 때문이다.
1997년 중국 정치가 덩샤오핑 사망
1997년 2월19일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이 향년 93세 일기로 사망했다. 모택동, 화국봉에 이은 세번째 최고지도자가 사망함으로써 중국에서는 젊은 정치시대가 막을 올렸다.
1978년 3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부터 시작된 `등소평시대`는 개방-개혁의 시대였다. 이른바 ‘흑묘백묘(黑苗白描)’, 곧 “쥐만 잘 잡는 다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가릴 필요가 없다”는 이론으로 대표되는 시대였다. 덩은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해 기업인과 농민의 이윤보장, 지방분권적 경제를 운영하며, 외국인투자 허용 등 중국 경제 성장의 기반을 닦았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한 공산당 독재를 고수했다. 중국의 이런 상황 때문에 당시 과감한 정치개혁을 추진한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사회주의 혁신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았다. 1989년 4월 톈안먼 사태의 무력진압을 지시한 인물이 덩샤오핑이다. 덩은 이 일에 책임을 지고 같은 해 11월 당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장쩌민 총 서기에게 물려주면서 정계에서 공식 은퇴했다.
등은 사천성에서 출생, 14살 때인 1918년 프랑스로 유학해 20년대 초반에 파리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발을 담그면서 혁명의 역정을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에서 공부하고 1929년 귀국한 등은 공산당원으로 맹활약, 대장정 초기인 1934년에 이미 당중앙비서장이 돼 있었다. 팔로군 정치위원을 거쳐 1956년 중공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그러나 국가주석 유소기와 함께 경제발전을 위해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던 그는 1966년 문화대혁명의 회오리 속에서 홍위병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실각했다. 1973년 주은래 총리의 추천으로 복권, 국무원 부총리가 됐지만 1976년 주은래 사후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던 이른바 4인방에 의해 다시 권력에서 밀려났다. 그해 9월 모택동이 사망하고 화국봉이 4인방을 제거하자 재기, 다시 중국 최고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1976년 스리랑카군 타밀족 농부 80명 학살
1976년 2월19일 스리랑카군은 스리랑카 동부 지역에서 80여명의 소수민족인 타밀족 농부 80명을 죽여 불태웠다. ‘아카라이파투(Akkaraipattu) 학살’로 불리는 이 사고는 사고 당일에 알려지지 않았고, 며칠 뒤 인근 부족장들의 진술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농부들은 곡식을 타작하고 있었고, 스리랑카 군인들은 근처 정글에서 공포탄을 쏘면서 농부들에게 접근했다. 여자들은 풀려났지만, 남자들은 군인들에 둘러싸여 손발이 묶인 채 논에서 총살당했다. 주변에서 탄약상자가 발견됐다는 것이 총살의 이유였다. 농부들은 추수된 볏단에 묶여 함께 불태워졌다.
1951년 ‘지드’ 지다
1951년 2월19일 1970~80년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전 앙드레 지드가 세상을 등졌다.
지금은 중년이 된 이 시대 젊은이들 중 상당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성경 문구로 시작하는 <좁은 문>을 읽고 고뇌에 찬 어조로 철학과 문학을 토론했다. 난해한 표현과 시적 문장들은 문학도들에게 꽤나 아카데믹한 토론거리를 제공했다. 당시 금지도서였던 <자본론>을 읽고 허름한 막걸리 집에서 시대의 아픔을 토로한 젊은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런 부류의 문학도들을 향해 ‘부르주아적인 낭만주의자’라면서 냉소를 보냈다.
앙드레 지드는 평생을 ‘반듯한 자아(自我)’와 ‘방황하고픈 자아’의 갈등 속에서 보냈다. 부인을 처녀로 지내게 한 강박적 금욕주의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다른 여자에게서 딸을 낳고, 동성애에 빠져 들었다. 노년에 들어서야 개인적인 번민에서 빠져나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사망 뒤 부인과 나란히 프랑스 귀베르빌에 묻혔다.
1945년 미 해병대, 일본 이오 섬 상륙
1945년 2월19일 미국해병대가 일본 이오섬(硫黃島, 류황도)에 상륙하자 태평양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미군은 1944년부터 장거리 폭격기 B-29를 동원해 일본 본토를 꾸준히 폭격하면서 오가사와라 군도(小笠原群島)의 작은 화산섬인 이오 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이판 북쪽 1006km 지점에 위치한 이오 섬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한 미군은 해군 함포와 네이팜 등으로 이오 섬을 집중포격한 뒤 해병대를 상륙시켰지만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미군은 한 달 가까이 폭격을 퍼붓다가 3월16일 6000명의 전사자를 낸 끝에 이오 섬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5개월 동안 2000대가 넘는 B-29 폭격기가 이 섬에 착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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