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3일]민간인 60만명 누가 죽인 것일까?

2007년 6자회담 5차 3단계 회의 합의

2007년 2월13일 오후 중국 베이징의 조어대에서 남북과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6자 회담 참가국들은 제 5차 3단계 회담을 개최했다. 참가국들은 이날 6자 회담에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처’라는 합의 문서를 채택했다.

‘초기조처’ 행동계획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의장국 중국) ▲북-미 관계 정상화 ▲북-일 관계 정상화 ▲경제 및 에너지 협력(의장국 한국) ▲동북아 평화·안보체제(의장국 러시아) 등 5개 워킹그룹을 설치해 30일 안에 첫 회의를 열기로 했다.

‘초기단계 이행계획’으로 북한은 60일 안에 영변 5㎿ 원자로 및 재처리 시설을 포함한 모든 핵시설의 폐쇄·봉인,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의 복귀·검증·감시를 하고, 관련국은 같은 기간에 중유 5만t 상당의 긴급 에너지 지원을 상호 조율된 조처로 실행하기로 했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각종 제재는 풀기로 합의했다.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이날 오후 회의 종료 뒤 “30일 안에 방코 델타 아시아(BDA) 문제를 포함한 금융제재를 푸는 문제에 착수했다고 중국 등 6자 회담 참가국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또 ‘2단계 이행계획’으로, 북한은 추출 플루토늄을 포함한 모든 현존 핵프로그램의 완전한 신고 및 모든 현존 핵시설의 불능화 조처를 취하고, 다른 참가국은 중유 95만t 상당의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참가국들은 대북 지원 부담을 ‘평등과 형평의 원칙’에 기초해 분담하기로 했으며, 구체적 지원 종류는 북쪽의 필요를 고려해 경제 및 에너지 협력 워킹그룹에서 협의·평가를 거쳐 결정하기로 했다.

또 (4월 중순께까지) ‘초기조처’가 이행되는 대로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 방안 모색을 위한 6자 (외무)장관급 회담을 신속하게 개최하기로 했다.

다만 일본은 ‘납치문제 먼저 해결’을 내세워 대북 지원 분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참가국들은 “일본이 자국의 우려사항이 다뤄지는 대로 동일한 원칙(평등·형평)에 따라 참여하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의 별도 ‘합의의사록’을 채택했다.

당시 스페인을 방문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은 합의문 채택을 환영하며 “국제사회가 이 합의안을 준수하는 데 한국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 뒤 BDA 문제와 중유지원 등을 통해 북한은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파괴하는 등 성의이는 이행을 통해 신뢰를 쌓았지만, 테러지원국 해제가 지연되면서 2008년 북한이 북핵 불능화 작업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무부가 같은 해 10월11일 자정 대북 태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발표했지만, 2달 뒤(12월8일)열린 6자 수석대표 회동이 성과 없이 휴회되고, 검증의정서 채택은 실패했다.

2009년 들어 북은 6자회담 불참과 핵시설 원상복구 방침을 천명했고 핵실험도 강행, 이후 줄곧 한반도 긴장 수위가 급격히 증가했다. 5차 ‘6자 회담’이후 5년이 지난 2012년 2월13일 남북관계는 북의 권력교체기라는 변수까지 맞물려 한 단계 높은 고차방정식으로 다시 난이도가 높아졌다.

 

2004년 한국군 이라크 파병안 국회통과

2004년 2월13일 한국의 국회는 많은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3000명의 이라크 추가 파병안을 큰표차로 통과시켰다. 수개월에 걸친 토론과 여러 차례 표결을 연기한 끝에 한국 국회는 이날 찬성 155명, 반대 50명, 기권 7명 등 약 3대 1의 압도적 찬성으로 추가파병안을 가결시켰다. 이에 따라 지난 1965년 베트남전 참전 이후 최대 규모인 3600여명의 한국군이 해외에 파병됐다.

한국은 이미 이라크 남부 나씨리야에 465명의 의무대와 공병대를 파견한 상태였다. 추가 파병으로 한국군의 규모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이라크에 파병중인 외국군중 3번째로 많은 수가 됐다.

한국군은 이라크 북부 원유 생산지인 키르쿠크 주변에서 치안과 재건 사업을 수행하게 됐다. 자이툰 부대로 명명된 한국군은 파병에 앞서 아랍어 훈련과 이라크 문화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파병 소요예산은 최고 약 2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한국이 이라크에서 미국과 협력함으로써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부쉬 행정부와의 관계에서 좀더 나은 입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파병동의안 통과는 북핵 문제에 따른 위기가 6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북한은 당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극력 반대했었다.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완전 국유화 선언

1979년 2월13일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최대의 미국계 석유회사 아람코를 완전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국유화의 효력은 1976년으로 소급 적용해 다른 산유국들과 보조를 맞췄다. 하루 전인 2월12일에는 이란 정부가 일체의 석유자원을 국유화 한다고 선언했다.

1960년 당시 세계 석유 수출의 85%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베네수엘라·사우디아라비아·이란·이라크·쿠웨이트 등 5개국은 9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출범했다. 그 후 8개국이 더 가입했다.

1968년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리비아 3국은 OPEC 내에서 아랍의 입지를 강화하고, 석유정책의 결정에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목적으로 ‘아랍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Arab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APEC)’를 설립했다. OAPEC에는 그 뒤 이라크와 시리아(1972년), 이집트(1973년)가 가입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카타르, UAE 등은 1974년 1월부터 석유산업을 60%까지 국유화 시켰다. 1975년 말부터 1976년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3개국은 완전국유화를 단행했다.

국유화가 지연됐던 사우디아라비아는 2년 뒤인 1978년에 메이저 정유사들과 실질적인 국유화에 대한 합의를 도출, 2월13일 완전한 국유화를 전격 선언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국유화는 1976년 1월로 소급 실시, 다른 3개국과 보조를 맞추는 형태를 취했다.

 

1974년 솔제니친, 소련에서 추방

1974년 2월13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그의 소설 <수용소 군도 Arkhipelag Gulag>의 내용이 문제시되면서 소련에서 추방당했다.

솔제니친은 1945년 스탈린을 비판한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돼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등에 감금됐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1960년대초 소련이 탈(脫)스탈린 정책을 펼치며 문화생활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솔제니친은 1962년 단편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Odin den iz zhizni Ivana Denisovicha>를 발표했다. 스탈린 시대 강제수용소에서 한 수인이 겪는, 틀에 박힌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국내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964년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브레주네프가 정권을 잡자 소련은 문화활동에 대한 이념적 제재의 끈을 다시 조이기 시작했고, 솔제니친의 작품은 출판금지를 당했다.

1970년에는 <암병동 Rakovy korpus>(1968)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 12월 그는 <수용소 군도> 제1부를 출간했다. 이 책이 출판되자마자 그는 소련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1945년 연합군, 융단폭격으로 독일 민간인 60만명 사망

1945년 2월13∼14일 밤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 등 연합군은 바로크 문화의 본산인 독일 드레스덴에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탈리아·일본 등가 맞섰던 연합군은 1944년 6월6일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승기를 잡고 있었다. 이날 드레스텐 공습은 지상군이 독일에 대한 마지막 공격 태세를 갖추기 전에 공중 폭격을 강화한 것이다.

영국 공군은 800대의 폭격기를 출격시켰고 미국 제8공군이 그 뒤를 따랐다. 대대적인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됐다. 3월23일부터는 연합군 사령관 몽고메리가 라인 강 건너 공격을 개시했고, 마침내 4월25일 베를린을 완전히 포위했다.

3만 5000명에서 13만5000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지만 연합군이 군사적으로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 희생자들은 거의 민간인이었다. 파시즘과 제국주의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벌이면 죄 없는 독일의 민간인들은 무참히 학살돼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을까. 공습을 지시한 아서 T 해리스 영국 공군 총사령관은 “적국의 민간인도 적이니, 그런 적을 위해 눈물 흘릴 필요 없다”고 말했다. 민간인 60만 명을 죽인 해리스는 종전 뒤 남아공으로 이주, 평화롭게 천수를 다한 뒤 1984년 91세를 일기로 죽는다. 죽은 뒤에는 ‘전쟁영웅’이라는 이유로 동상이 건립된다.

쾰른(1942년)과 함부르크(1943년), 드레스덴(1945년) 등에 뿌려댄 폭탄만 해도 85만t이었다. ‘융단폭격(Carpet bombing)’이라는 용어가 이때 탄생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가리키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용어는 드레스덴 공습 때 영국 공군이 투하한 4~5t짜리 폭탄 이름에서 비롯됐다. 도시 한 구역(Block)을 한 방에 날려(bust)버린다는 뜻이다.

연합군의 독일 공습과 일본 원폭투하는 한국에 독립을 가져다 줬다. 그런 한국인들에게 독일의 민간인 60만 명의 죽음은 어떻게 이해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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