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8일] 한중일 우정의 가교 콘서트
2008년 한·중·일 ‘우정의 건반’ 두드리다
2008년 2월8일 오후 7시 일본 도쿄 우에노의 국립박물관 헤이세이칸(약 360석)에서 열린 ‘한·중·일 우정의 가교 콘서트’에서는 한중일 3국의 대표적인 음악인들이 한 무대에 올라 아름다운 하모니를 선보였다. 한국의 정명훈씨(서울시향 음악감독)가 피아니스트로, 중국의 여류 음악인 자오징(趙靜)씨가 첼리스트로, 일본의 가시모토 다이신(?本大進)씨가 바이올리니스트로 각각 참여했다.
이 콘서트는 음악을 통해 세 나라의 우정을 넓혀가자는 취지로 2004년 도쿄 민예관(民藝官) 공연 이후 매년 열리고 있다. 2002년 나루히토 왕세자가 정명훈씨의 지휘로 도쿄 무대에 오른 오페라 ‘나비부인’을 관람한 게 인연이 됐다. 나루히토 왕세자가 비올라를 연주한다는 얘기를 들은 정씨가 즉석에서 협연을 제안한 것.
나루히토 왕세자는 일본 왕실 가족이 다니는 도쿄 가큐슈인대학 재학 중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수석을 지냈다. 왕세자는 취미로 악기를 배우는 왕실 전통에 따라 비올라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해마다 이 콘서트에서 매년 비올라를 연주하던 일본의 나루히토(德人) 왕세자는 이날은 직접 연주를 하는 대신 객석에서 연주를 감상했다.
3국의 초등학생 150명이 초청된 이날 콘서트에서는 브람스 피아노 4중주곡,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 등이 연주됐다. 정명훈씨는 협연 마지막에 즉흥적으로 23일 생일을 맞는 왕세자를 위해 ‘해피 버스데이 투 유’를 연주해 분위기를 돋우기도 했다.
2008년 북한 어부 가족 북으로 송환
2008년 2월8일 서해에서 표류하던 북한 황해남도 거주 어부 가족 22명을 해군이 검거해 곧바로 북조선으로 되돌려 보냈다. 당시 국가정보원은 “고기잡이 중 표류해 남한으로 떠내려 온 것”이라며 “남한에 귀순할 의사가 없어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되돌려 보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남한 사회 일각에서는 이들은 표류한 것이 아니라, 탈북해 남한에 귀순하려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어린 아이들까지 고기잡이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다 보통 이런 경우 한 사람 조사하는 데 1~2일이 걸리는데 22명에 대하 조사를 단 14시간 만에 모두 북송한 점, 14시간 동안 표류한 고무보트가 멀쩡했던 점 등이 의혹의 근거로 제시됐다. 특히 북한은 탈북을 막기 위해 한 배에 일가족이 다 타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북측은 22명의 북송 직후 모두를 처형했다는 설도 나돌고 있다.
1999년 유럽 50년 만에 최대 폭설
1999년 2월8일 유럽 지역에 50년 만에 최대 폭설이 쏟아졌다. 1.5미터 이상의 폭설로 눈사태가 잇따랐다. 오스트리아 티롤주에서 눈사태로 18명이, 스위스 발레주에서는 9명이 사망하는 등 유럽 각국에서 모두 4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는 고속열차 테제베(TGV)의 운행이 중단되고 항공망도 마비돼 주민과 관광객들의 발이 묶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빙판으로 변한 도로 때문에 1000킬로미터 가까이 차량 정체가 빚어졌다.
1963년 이라크 쿠데타 발생
1963년 2월8일 이라크에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아랍부흥사회당(바트당)의 압둘 아리프 대령이 이끄는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쿠데타군은 수도 바그다드에 입성, 국방부 건물을 점거하고 5년 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카셈 대통령을 살해했다. 대통령이 된 아리프는 얼마 뒤 군부와 협력해 바트당 세력을 제거하고 주요기업의 국유화 등 일련의 사회주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아리프도 집권 5년만인 1968년 군부쿠데타로 쫓겨나고 다시 바트당이 정권을 잡는다.
1921년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 사망
1921년 2월8일 러시아 무정부주의 정치지도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사망했다.
크로포트킨은 1842년 3곳의 영지에 1천200여 명의 농노를 소유한 모스크바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흔히 지식인들은 사회적 모순을 보고도 눈을 돌리기 일쑤이지만 크로포트킨은 달랐다. 15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위사관학교 입학, 기병대 장교 근무, 퇴역 후엔 지리학자로서 북만주 일대 탐험 등 화려한 경력을 뒤로 하고 1872년 스위스 국제노동자연맹(IWA)에 가입,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러시아에서 니힐리즘 성향의 ‘차이코프스키단’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됐으나 3년 뒤 탈옥하면서 유명세를 탔고, 이후 스위스와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무정부주의 활동에 참여했다. 1881년 다시 프랑스에서 체포돼 5년형을 받았다. 그는 특히 권위주의적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1917년 2월 혁명 후 러시아로 돌아와 레닌의 볼셰비키에 저항하다 1921년 2월8일 사망한 것이다. 그의 장례식에는 10월 혁명 이래 가장 많은 지지자들이 모였다.
“인간을 포함해 종(種)의 진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쟁이 아닌 협동이다.” “내가 이 고상한 정서의 세계에서 생활하기 위해 소비하는 모든 것은 바로 땀 흘려 농사지어도 자식들에게 빵 한 조각 배불리 먹일 수 없는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것들이 아닌가.” 그가 한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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