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5일]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 영도 거부한 코뮌 출범한 날
1967년 상하이 코뮌
1967년 2월5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4인방의 리더 격인 장춘차오(張春橋)가 주임을 맡고 야오원위안(姚文元)과 왕훙원(王洪文)이 부주임을 맡아 인민공사가 성립됐다. 기존의 중국공산당과 정부 영도기구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이들은 ‘코뮌’의 이념을 받든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영도기구를 ‘인민공사’로 이름 붙였다.
같은 해 1월 ‘상하이 코뮌’ 또는 ‘1월 혁명’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이 점차 고조되던 시기에 발생했다. 상하이 지방의 노동자들이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거부하고 자체 코뮌을 선언한 것. 당의 공식 슬로건에 따라 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국가의 소멸과 심지어는 당 자체의 소멸을 요구했고, 직접 코뮌적 사회를 조직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상하이 코뮌은 설립된 지 단 18일 만에 마오쩌둥의 지시로 붕괴하고 만다. 마오는 군대를 동원, 질서를 회복한다. 인민에게 ‘반란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독려하고 부추긴 문화혁명의 온전한 결론 앞에서 그 자신이 후퇴한 것. 광동과 상하이 코뮌에서 희생당한 혁명가의 대부분은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들이 염두에 둔 모델은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파리의 시민,노동자들의 봉기로 세워졌던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 정권인 ‘파리코뮌’이었다.
파리코뮌의 최고의사 결정기구는 코뮌 평의회로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정치적 혁명 독재를 신봉하는 신 자코방파, 파리인민의 혁명 독재에 의한 사회주의 건설을 부르짖는 블랑키파, 제1인터내셔널파의 노동자와 이에 공명하는 지식인 등 시민들이 선출한 의원으로 성립되었다. 입법권과 집행권을 아울러 장악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부였다.
모든 관공기관의 공선제(公選制)와 리콜(recall)제, 주민소환제 등 인민주권 원리에 바탕을 직접 민주주의적 체제원칙을 표명하였다. 또한 공장시설의 접수 및 노동조직에 의한 민주관리와 집단적 소유에의 이행을 지향하고 분권적 사회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파리코뮌이 내부분열과 베르사이유 정부군에 의해 2개월여 만에 와해되었듯이 ‘상하이 인민공사’, 즉 ‘상하이 코뮌’도 18일 만에 사라졌다. 마오쩌둥의 제동으로 18일 뒤인 2월 23일 ‘상하이 혁명위원회’로 명칭이 바뀐 것이다.
마오는 ‘상하이 인민공사’의 주역인 4인방을 강하게 비난했다. 마오의 말을 들어 보면 당시 사회주의 논쟁의 현주소를 읽을 수 있다. “당신들은 상하이 인민공사 성립 후 발생할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았는가. 각 성과 시가 인민공사로 명칭을 바꾸게 되면 국무원은 무엇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은 또 무엇으로 불러야 하나. 이는 정체(政體)와 국호를 바꾸는 문제를 제기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인민공사로 바뀌어야 하나,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중화인민공사의 주임으로 아니면 사장으로 불러야 하나. 보다 긴급하게 생각하여야 할 문제는 외국의 승인 문제이다. 소련이 골치 아파 승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중화인민공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좋지 않다.”
마오는 이 같은 제동은 탈권을 위해 4인방을 이용했던 마오가 탈권 작업이 끝나자 이들의 맹목적 급진노선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마오는 홍위병의 급진노선을 제동을 걸기위해 문화대혁명 초기의 홍위병 지도자를 숙청했으며 대학생들을 대거 하방시켰다.
2008년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영면
2008년 2월5일 한국의 무장 의열독립운동의 마지막 의거인 ‘부민관 폭파사건’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문기(趙文紀) 선생이 영면했다. 향년 82세.
1927년 5월19일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한 선생은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이 일으킨 대규모 폭동을 주도한 유만수와 함께 수배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귀국, 1945년 5월 유만수 주도로 경기도 안성 유씨의 집에서 결성된 대한애국청년당에 참여했다.
이들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망 약 3주 전인 1945년 7월24일 경성부의 부민관에서 친일파 박춘금 주도로 열린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라는 어용 행사를 겨냥해 폭발물을 터뜨렸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마지막 의열 무장항일 독립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생의 생애는 광복 후에도 순탄치 않았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인민청년군 사건으로 복역했고 1959년에는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에 연루되는 등 대한민국 역대 정권과의 불화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도 받지 못했다.
부민관 사건은 당대에는 일제의 보도통제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1980년대에 들어와서 재조명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 받았다. 저서로 <슬픈 조국의 노래>가 있다.
2006년 일본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거짓광고 방영
2006년 2월5일 일본 시마네 현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거짓 TV광고가 주 1회씩 방영되고 있음이 공식 확인됐다. 지역 일간지인 대구매일신문이 같은 달 3일 보도에서 “시마네현은 2일 저녁부터 TSK, BSS, NKT 등 일본 3개 민영 지방TV방송을 통해 30초 분량의 광고를 2월 한 달 주 1회씩 내보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광고는 <돌려 달라! 섬과 바다>라는 제목의 동영상과 함께 독도의 위치·역사를 설명하고, 2006년이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이름의 일본 땅으로 고시된 지 100주년이라는 점을 알리는 광고였다.
일본인들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로 하기로 했는데, 한국인들이 1952년부터 이를 무시하고 불법으로 다케시마를 점거하고 있다”면서 “한국인들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 문제를 따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전혀 법적인 근거를 갖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936년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 개봉
1936년 2월5일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가 개봉됐다. 찰리 채플린의 마지막 무성 영화로, 코미디다. 당시 산업혁명을 날카롭게 비판, 미국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미국에서 쫓아냈지만 흥행은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