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4일] 한국의 김좌진 장군 피살돼

2010 – 일본교직원조합 “관동대학살 피해 조선인 6600명”

2010년 1월24일 일본 야마가타(山形)현에서 열린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의 교육연구 전국집회에서 한 해 전인 2009년 “1923년 일본 간토(關東)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에게 자행된 학살(관동대학살)의 피해자는 6600명”이라고 가르친 사례가 공개됐다. 일교조는 매년 전국집회를 열어 직전년도 교육사례를 발표하고 토론한다.

이날 사회과 교육분야 분과회의 보고자는 “중학교에서 ‘인권의식을 높인다’는 목표 아래 당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학생들에게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관동대학살의 희생자 수가 6600명에 이르렀다는 내용을 교육시켰다”고 밝혔다. 이런 숫자는 일본 측이 주장해온 2333~2613명의 3배에 이르는 것으로, 독립신문이 사망자로 전한 6661명에 가까운 것이다. 또 일본 소학교(초등학교)에서 고교에 이르기까지 상당수 교과서가 관동대학살을 다루면서 조선인 피해자를 6000~7000명 사이로 기술했다고 일본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인 교이쿠(敎育)출판의 ‘소학교 사회6상’에는 “죄 없는 수천 명의 조선인이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기술돼 있다.

관동대학살은 간토대지진으로 사망자가 9만3000여 명에 이르면서 민심 수습이 최대 현안으로 부상하자, 일본 정부가 이를 위한 방편으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고 조직적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촉발된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 사건이다. 당시 이런 만행은 일본 각지에서 자행됐다.

앞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교직원단체인 ‘홋카이도교직원조합’은 2008년11월28일 발행한 기관지 ‘홋쿄(北敎)’에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한국에서는 ‘독도’가 일본에 의한 한국 식민지화의 과정에서 점령됐으므로 침략?식민지 지배의 문제라고 여겨지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을 냉정히 연구해 보면 한국의 주장이 사실에 따르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의 극우단체의 식민지 역사 미화 행태보다 더 객관적이라는 분석이다.

2010 빈 라덴 “성탄절 미 테러 내가 계획”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2010년 1월24일 “오사마 빈 라덴이 지난해 성탄절 미국행 비행기 폭파 미수사건은 자기가 계획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육성 테이프를 단독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테이프 속 육성의 주인공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공격을 계속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실제 빈 라덴인지는 즉각 확인되지 않았지만, <알자지라>는 “빈 라덴이 테러 직후인 2009년 말 녹음한 것”이라고 확인했다. 육성의 주인공은 “우리가 팔레스타인에 건재하는 한 미국은 평화로운 생활을 꿈꿀 수 없을 것”이라며 “미국이 이스라엘을 계속 지원하는 한 우리의 공격도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가자지구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미국이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것은 불공평하다”고도 했다. 테이프는 또 나이지리아인 우마르 파루크 압둘무탈라브의 성탄절 테러 기도가 지난해 9월 9.11동시테러 8주년에 맞춰 미국인들에게 보낸 자신의 메시지를 재확인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1984 애플, 매킨토시 최초 출시

애플사는 1984년 1월24일 당시 유행하던 명령 줄 인터페이스 대신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마우스를 채용해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PC ‘매킨토시(Macintosh)’를 전격 출시했다.?

1930 김좌진 장관 피살

독립운동가로 1920년 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1930년1월24일 피살됐다. 영안현(永安縣) 중동선(中東線) 산시역(山市驛) 자택 앞에서 과거 부하였던 주중청년협회 박상실(朴相實)에게 암살당했다.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차 돈의동에 사는 인척을 찾아갔다가 일경에 잡혀 2년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복역 중 김구와도 만난다.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김좌진은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시를 지었다.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 박상진 등과 활동하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면서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 것이다”라는 시를 지었다.

대한정의단에 합류해 군사부문 책임자가 됐고, 이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뒤 사령관으로 추천됐다. 1919년 무오 독립선언에 서명했다.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했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 이상한 낌새를 느낀 김좌진은 부하들을 이끌고 자유시를 탈출했다. 1924년 6년 만에 아들 김두한과 상봉한 김좌진은 이듬해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을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했다. 또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했다.

한국의 문화관광부는 김좌진 장군을 2000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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