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4일] 비잔틴 교회와 가톨릭 화해의 물꼬 튼 날

자신의 경호원에 의해 암살 당한?파키스탄 살만 타시르

2011년 1월4일 파키스탄의 기업가이자 정치인인 살만 타시르(펀자브어로 ????? ?????, 1944년 5월31일 출생)이 이슬라마바드에서 신성모독에 대한 법을 반대하던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자기 경호원 말리크 뭄타즈 카드리에 의해 살해당했다.

살만 타시르(2009년)

타시르는 파키스탄 인민당 당원이었으며, 페르베즈 무샤라프 이하 무하마드 미안 숨로 총리 내각에서 장관 대리를 지낸 적이 있다. 그는 또한 월드콜 그룹의 사장이자 최고경영자였다.

타시르는 사퇴하는 칼리드 막불의 뒤를 이어 2008년 5월15일에 펀자브 주의 주지사로 취임했다.

카드리는 타시르의 등에 총을 20여발이나 쏴 살해했는데, 그동안 아무도 그를 사살하지 않아 배후 음모설까지 제기됐다. 더욱이 타시르가 살해당하자 마울라나 파잘루르 레흐만, 레흐만 말리크등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살인자 카드리를 영웅 대접하면서 타시르를 신성모독자라고 비난했다. 아울러 카드리는 2002년 펀자브 경찰 특수부대에 선발된 무렵 종교적 극단주의와 밀접한 활동 때문에 ‘위험분자’로 분류됐었다. 그런 그가 2008년 어떻게 펀자브 주지사 경호 업무를 맡게 됐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살인과 테러 혐의로 체포된 카드리가 살해 이튿날 모습을 드러내자 수백명에 이르는 지지자들은 꽃잎과 화환을 던지며 그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나타냈다. 심지어 레흐만 말리크 내무장관도 자신도 신성모독자는 총으로 쏴버렸을 것이라며 망언 수준의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반면 타시르 주지사의 장례식장에서는 수천명의 조문객이 모여 침묵 속에 고인을 추모했다.

언론인이자 작가인 아흐메드 라시드는 “파키스탄의 (정신적) 양극화는 매우 심각하다”며 “목소리를 내는 소수의 극단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침묵하는 다수”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성모독은 파키스탄인들이 매우 민감하게 여기는 문제임을 반영하듯 많은 사람들이 암살범인 카드리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데오반디 종파에 속하는 정당 ‘자미아트 울레마 이슬람-파잘’을 이끄는 마울라나 파잘루르 레흐만은 “신성모독자를 동정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를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타시르 주지사의 지지자들을 경고했다.

바렐비 종파의 정당 ‘자마트-에-알-에-순나트’의 지도자 500여명은 지지자들에게 타시르 주지사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타시르를 동정하지도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2010 UAE 두바이에 현대판 ‘바벨탑’ 개방

지난 2010년 1월4일 아랍에미리트(UAE) 소재 세계 최고층 빌딩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 아랍어 ??? ?????,)’가 4일 문을 열었다. 개장 직전까지 부르즈 두바이로 알려진 이 빌딩은 5년 간의 공사를 마치고 개장했다. 총 160층으로 1~39층은 호텔, 40~108층은 고급 아파트, 109층 이상은 사무공간으로 사용된다.

123층과 124층에는 두바이 전경을 볼 수 있는 야외 전망대 ‘정상에서(At The Top)’가 들어섰고, 엘리베이터만 57대가 설치됐다. 높이는 828m. 대만의 ‘타이베이 101타워’(508m)보다 300m 이상 더 높다. 연면적은 49만5870㎡로,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11만9000㎡)의 4배가 넘는다.

2005년 2월 착공 이후 33만㎥의 콘크리트, 3만1400t의 철강, 약 12억 달러의 건설비가 들어갔다. ‘사막의 꽃’을 형상화한 이 건물은 최대 95㎞ 밖에서도 보일 정도다. 삼성물산 건설부문, 벨기에 베식스그룹, 아랍에미리트 아랍텍이 건설에 참여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 예루살렘 방문

1964년 1월4일 교회일치를 위한 순례에 나선 교황 바오로 6세가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500여 년 동안 가톨릭과 단절된 동방 정교회(비잔틴교회)의 수장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올리브산에서 역사적 만남을 갖는다. 교황과 총대주교는 두 차례 회담에서 가톨릭과 정교회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한다.

1965년 12월7일에는 1054년 동방교회에 대해 내려진 파문을 서로 철회하기로 약속했다. 1967년 7월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와 교황 바오로 6세가 서로 포옹하고 주님의 기도를 함께 바치는 역사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이 만남을 계기로 가톨릭과 정교회는 급기야 1971년 상호 파문을 무효화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3년 6월3일 당시 교황 요한 23세가 사망한 뒤 6월 21일 새 교황에 등극한다. 전임 교황의 뜻을 이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목표로 ▲교회 쇄신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노력 ▲현대세계와의 대화 ▲교황청 구성의 탈(脫)이탈리아화를 통한 국제화 등을 내세웠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재임 중 수차례의 성명을 통해 ▲인구 ▲세계평화 위협▲과격 민주주의 ▲인종차별주의 등을 경고했으며 ▲군비 축소를 호소했다. 가톨릭과 정교회의 화해 7년 뒤인 1978년 영면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0년 초 공산권 몰락과 함께 동구와 구소련지역에 대한 카톨릭의 세력 확대 논쟁으로 화해 분위기는 경색됐다. <사진제공= 다음블로그 세포네(http://blog.daum.net/duaworld/)>

 

1960년 알베르 카뮈 사망

“모든 것이 완성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내가 바라는 마지막 소원은 내가 사형을 당하는 날 보다 많은 구경꾼들이 나를 증오의 함성으로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 알베르 카뮈가 1942년 7월 29살의 나이에 발표한 <이방인>의 마지막 문장이다.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사소한 시비 끝에 아랍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 뒤 법정에서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그랬다”고 진술하는 인물이었다.

그 까뮈가 1960년 1월4일 파리 부근의 빌블르뱅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나이 57세. 3년 전인 1957년 카뮈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겸손한 카뮈는 당시 “내가 심사위원이었다면 분명 앙드레 말로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 희곡 <칼리굴라> 등을 통해 부조리한 인간과 사상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소설 <페스트> 등의 작품을 남겼다.

20세에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이혼하고 공산당의 회교도 해방운동에 공감, 알지에 지구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러나 곧 당의 정책 변경에 싫증을 느껴 탈당, 공산당과 관계를 끊어 버린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저항운동에 참가,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후에 일간지가 된 <콩바>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좌파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의와 진리, 모든 정치 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좌파였다. 나중에는 혁명적 수단과 유물사관(唯物史觀)에 반대, 점진적·개량적·중용적 방법을 주장했다.

주로 낯선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개인의 소외, 악의 문제, 죽음이라는 임박한 파국을 이야기했다. 전후 지식인들의 소외 의식과 환멸에 천착한 작품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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