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둘, 하나, 둘!”
논두렁 사이로 뛰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힘찼지만, 아이들을 이끄는 내 구호는 영 시원치 않았다. 아이들은 재미있다며 웃고 떠들며 따라왔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감춘 채 체육 시간 50분을 채워야 했다.
저쪽 대추나무 옆에서는 아이들이 마주 서서 손바닥으로 서로를 밀어내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한쪽 구석에서는 허리 돌리기 연습이 한창이었다. 스베타는 우리가 뛰기 시작할 때부터 허리를 돌리고 있었는데, 아직도 계속하는 걸 보니 이번 체육대회에 반 대표로 나갈 생각인가 보다.
그렇게 우리는 논두렁에서 체육 시간을 보냈다.
작은 운동장조차 없어 아이들을 미니버스에 태워 이웃 대학교의 농구장과 축구장을 찾아다녀야 했다. 아이들에게 체육 시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이곳저곳을 오가는 일이 우리의 일상이자 나의 고민이었다.

2024년 11월,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의 이야기가 SBS 희망TV를 통해 20분 동안 방송되었다. 고려인 청소년들이 대안학교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소개되었고, 방송의 마지막 화면에는 운동장도 없이 논두렁을 달리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담겼다. 굿네이버스의 도움으로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는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부모와 선조의 나라로 돌아온 디아스포라 고려인 청소년들에게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는 꿈을 키우는 터전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학교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교실도 넉넉하지 않았고, 화장실과 급식실도 충분하지 않았으며, 운동장은 아예 없었다.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불편함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이곳에서 꿈을 만들어 갔다. 방송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었고, 방송이 끝난 뒤 굿네이버스는 아이들을 위한 운동장을 함께 꿈꾸기 시작했다.
얼마 뒤 굿네이버스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우리카드가 사회공헌재단을 통해 고려인 청소년 지원사업을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와 함께하고, 운동장 건립도 추진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마침내 우리 학교에도 운동장이 생기는 것이다.

그 뒤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운동장을 지을 장소가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리고 마침내 2026년 9월 19일, 본교에 운동장이 마련됐다.
운동장 건립을 위해 애써 주신 권민정 사업본부장님, 전재규 경기남부 본부장님, 류은선 사무국장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고려인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꿈을 향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힘을 보태 주신 우리카드 임직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 따뜻한 마음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고려인 청소년들은 이제 더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하고 뛰놀며, 꿈꾸는 사람으로서 자신들의 역량을 키워 나갈 것이다. 여러분께서는 아이들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든든한 역할을 해 주셨다.
준공식이 열리는 아침, 학교는 이른 시간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안성시 다함께돌봄센터 1호점의 고려인 아동들은 축하의 노래를 준비했고, 꿈 지원단인 공도 어머니 방범대의 엄순옥 대장님과 손미애 사무국장님, 황진택 전 안성시의원님도 축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함께해 주셨다.
1부는 운동장 건립 기념행사, 2부는 체육대회로 꾸렸다. 꿈만 같던 우리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체육대회를 열 수 있다니, 그 기쁨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이자 기적이었다.

100여 명이 함께한 기념행사와 체육대회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자리였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운동장에서 쫓겨날까 눈치 보며 아이들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은 마음껏 달리고, 마음껏 웃고, 마음껏 함성을 지를 수 있다. 그동안 논두렁 위에서 이어졌던 작은 발걸음이 이제 우리 운동장 위에서 힘찬 달리기로 이어진다.
우리 고려인 청소년들에게 대한민국은 그저 잘사는 나라여서 이주해 온 곳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자신들의 뿌리가 닿아 있고, 자신들이 속한 나라다. 이제 우리는 고려인의 역사를 유랑의 시간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100년의 유랑을 지나 이곳에 뿌리내리고, 함께 살아갈 대한민국의 어른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 주었으면 한다.
논두렁에서 시작한 발걸음이 이제 운동장 위에 섰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다시 뛰고, 다시 꿈꾸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